[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언론 시사를 놓치고 25일 개봉관에서 본 ‘인턴’은 단순한 심심풀이용 휴먼 코미디가 아니었다. 할리우드가 금융 위기 극복 이후 본격적으로 작가조합에 돈을 풀기 시작했다는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은퇴한 70대 노인이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돼 워커홀릭 30대 여성 CEO를 만나 벌이는 좌충우돌과 진부한 눈물 쥐어짜기 오락물일 거라는 선입견은 영화 시작 20분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
점점 퇴물 취급 받으며 밀려나지만 여전히 자신의 쓸모와 건재를 입증하고 싶은 실버 세대의 고민과 밖에선 유능한 커리어우먼이지만 그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워킹 맘의 말 못할 고민 같은 보편적 정서를 세련된 화법으로 그렸을 뿐 아니라 위로받고 싶은 이들을 파고드는 솜씨 또한 제법이다. 그래서일까. 추석 연휴 극장가에서 기대작 '에베레스트'를 제치고 외화 2위를 달리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손수건을 안 가지고 다니지. 근데 자네 손수건의 진짜 용도가 뭔 줄 아나? 바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한 거라네’ 같은 주인공의 대사는 촌스럽고 소박하지만 영화가 촘촘하게 연결해놓은 여러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그 어떤 화려한 장신구보다 빛난다. 객석에서 파우치가 열리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릴 때도 바로 이런 ‘자체 발광’ 지점이었다.
콧대 높은 자존심과 대표라는 지위 때문에 가슴 속 용수철 밑에 꾹꾹 눌러두었던 억눌린 감정이 터질 때 건네받는 손수건의 위력은 그래서 몇 곱절 배가 돼 돌아온다. 관록의 로버트 드 니로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각광받기 시작한 앤 해서웨이의 뛰어난 연기 조합 덕분이겠지만 ‘인턴’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작은 힌트와 단서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착하고 영리하다.
손때 묻은 낡은 서류가방과 만년필을 애지중지하는 구닥다리 벤과 맥북과 SNS로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줄스의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브루클린에 자리한 업무 공간. 이곳에서 40년간 전화번호부 인쇄업을 한 벤은 온라인 쇼핑몰 벤처 회사로 변모한 같은 건물에서 자신의 청춘을 추억하며 되새김 한다. 구글에 밀려 무용지물이 된 전화번호부는 아내와 사별하고 독거노인이 된 쓸쓸한 노년을 맞은 벤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영화는 적잖은 웃음 포인트를 장착했는데 가장 큰 폭소가 나온 장면은 벤과 줄스의 취향이 부딪치고 전복되는 지점이었다. 바로 SNS 신봉자인 줄스가 절대 봐선 안 되는 메시지를 엄마에게 실수로 전송하고, 이를 아날로그 세대 벤이 단순 무식하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장면이었다. 취향이 다르고 대화가 안 될 거라고 등 돌리지 말고 그럴수록 마주보며 보완제가 돼야 한다는, 세대간 불통과 불화를 꼬집는 소동이었다.
미국의 급성장중인 벤처 회사를 무대로 하다 보니 우리와 정서적으로 이질적인 장면도 군데군데 나와 눈길을 끌었다. 대표적인 게 사내 마사지사의 등장. 회사가 컴퓨터를 다루는 직원들을 위해 여성 마사지사를 고용해 직원들의 어깨와 허리를 하루 종일 안마해주는 장면이 나오자 객석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놈의 스펙 타령 역시 빠지지 않아 헛웃음도 유발했지만, 감기 기운만 있어도 쿨 하게 병가를 내고, 상사 눈치 보지 않는 칼 퇴근에 탁 트인 공간에서 수평적인 직장 문화가 등장할 때마다 ‘부럽다’는 미생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줄스가 자신을 대신할 전문 CEO 영입에 나서며 낭패감과 공허함을 맛보는 사이, 벤은 자신의 건재와 새로운 사랑까지 찾으며 인생의 활력을 되찾는다.
임금 피크제와 불완전 고용, 귀족 노조와 3포 세대 같은 지긋지긋한 고도 압축 성장의 부산물을 잠시 내려놓고 ‘인턴’이 제공하는 고기능 안마 의자에 앉아볼 것을 권한다. 혹시 아는가. ‘일하고 쉼 없이 사랑하라. 그것이 행복한 인생이다’라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벤의 말에 뜻밖의 위로와 용기를 얻을 지. 복잡해 보이지만 인생은 정답 대신 선택이 있을 뿐이며, 결국 어디에 가중치를 두고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걸 이 영화는 보여준다./bskim012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