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부산, 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어느덧 2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반환점을 돌고 서서히 폐막을 향해 랜딩 기어를 내리고 있다. 작년 다큐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과 예산 삭감 등 여러 내홍을 겪었지만 아직까진 양적 질적으로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서 손색없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다.
연일 칸 부럽지 않은 화창한 날씨만큼 이곳에서 빠질 수 없는 메인 이벤트가 바로 대기업들이 라인업을 발표하며 간접적으로 사세를 보여주는 투자배급사의 밤이다. ‘미스터 고’ ‘군도’의 2년 연속 흥행 부진으로 여름 시장에서 고개를 숙여야 했던 쇼박스는 모처럼 ‘암살’ ‘사도’의 잇단 흥행으로 모처럼 활기찬 쇼박스의 밤을 맞을 수 있었다. SNS에서 화제가 된 포항 소맥 제조 달인을 초빙해 인기가 높았다는 후문이다.
CJ도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올 여름 톱픽 무비 ‘베테랑’으로 이곳 부산에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클럽 입구에서 돌아간 사람 수가 더 많았다는 CJ의 밤에는 커밍순 영화 ‘성난 변호사’를 비롯해 ‘히말라야’ ‘궁합’ ‘아수라’ ‘형’ 등 주요 라인업 출연 배우와 AOA가 초대가수로 무대를 달궈 분위기를 ‘불판’으로 만들었다.
기대작 ‘뷰티 인사이드’가 200만 관객을 넘으며 선전했지만 옆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여름, 추석 성적표를 받아든 NEW는 5일 중국 파트너와 합작 회사를 결성하는 기자회견으로 NEW의 밤을 대신했다. 이에 앞서 롯데도 ‘협녀’ ‘서부전선’의 예상 밖 부진으로 한 패밀리 레스토랑을 빌려 맥주와 감자튀김으로 조촐하게 롯데의 밤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이곳 부산영화제에서 메이저 4대 배급사 중 생색은 안 나지만 가장 의미 있는 곳에 돈을 쓴 회사는 단연 롯데가 아닐까 싶다. 올해로 네 번째인 롯데 시나리오 공모전 시상식을 개최해 무명작가들을 꾸준히 발굴, 격려한 곳은 롯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상금도 입상자 4명에게 1억6000만원이나 풀었다는데 이는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시나리오 대전인 신화창조 프로젝트, CJ문화재단의 피칭 시스템 아지트와 비교해 국내 최대 규모다.
부산에서 만난 서정 시나리오 작가는 “신화창조, 아지트도 물론 유명하지만 작가 지망생과 기성 작가들이 가장 눈독 들이는 공모전은 역시 롯데”라며 “상금도 최고이며 무엇보다 영화 제작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롯데에 양질의 책이 몰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제작돼 흥행한 영화는 없지만 쿠킹 과정이 필요한 만큼 조만간 성과가 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7번방의 선물’을 쓴 유영아 작가도 “배우, 감독들에게 공들이는 것만큼 배급사들이 작가들에게 투자한다면 한국 영화가 지금보다 한결 단단하고 풍성해질 것”이라며 “유명 감독이 각색에 참여한 뒤 슬쩍 작가를 원안으로 밀어내거나 각본 타이틀을 차지하는 관행부터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도배, 장판 해놓고 이 집 내가 지었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사실 깐깐한 롯데가 이렇게 시나리오 공모전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명약관화하다. 돈이 풍족해서도, 회사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후발주자인 만큼 좋은 책을 경쟁사보다 먼저 차지하겠다는 선점 의지 때문이다. 탁월한 설계도면을 쥐고 있어야만 좋은 감독, 배우들과 협업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공정이 생각처럼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시나리오 개발은 이제 막 볍씨를 뿌려 모종을 가꾸는 단계일 텐데, 언제 벼를 재배해 쌀을 수확하고 밥을 지을 것인가. 그래서 CJ, 쇼박스 같은 회사는 윤제균 최동훈 장훈 같은 기성 감독들을 전속 계약해 덤으로 책까지 확보하는 지름길 전략을 구사한다. 반칙은 아닐지 모르지만 문화 다양성과 영화 생태계를 위해선 롯데 방식이 훨씬 이롭고 합리적이며 바람직하다.
‘엽기적인 그녀’로 돈을 번 신씨네의 연중행사는 영화 잡지와 공동으로 매년 시나리오 공모전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압구정역에 있던 신씨네에 가면 늘 산더미처럼 시나리오가 쌓여있었고 옥석을 가리기 위한 직원들의 독파 작업이 늘 벌어지곤 했다. 요즘 영화 대학으로 분주해진 명필름도 시나리오 욕심이 많은 제작사였다. ‘좋은 영화는 반드시 좋은 책에서 나온다’는 걸 일찌감치 경험했고 여기에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것이다.
롯데가 매년 비용을 들여 시나리오를 뽑아내지만 지금까지 빛을 본 영화는 1회 대상작 ‘관능의 법칙’(이수아 작가) 한 편 뿐이다. 이마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 했다. 그래서 솔직히 3회쯤 하고 슬그머니 축소하거나 폐지 수순을 밟을 것으로 추측했다. 하지만 올해 시상식에서 차원천 대표는 “내년에도 문 닫지 않겠다. 대한민국 시나리오 작가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내겠다”고 강조했다.
올해 롯데가 851편 중 걸러낸 네 수상작이 과연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과 만날지, 아니면 투자팀 홍나경 과장 캐비닛에 묵혀 사장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롯데가 영화 생태계 페어플레이를 위해 설계도면 제작에 돈을 집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올해 롯데 수상자로 선정된 이진우(김포 프로젝트), 문제용-정자영(당신의 모든 것), 박상혁(DJ에게), 이차연(팬픽) 작가의 행운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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