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고려 말의 이야기인데, 자꾸만 떠올리는 현실. 사극 ‘육룡이 나르샤’가 펼쳐놓은 반전의 마지막이 안방극장에 주는 씁쓸함이다.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치 대립을 펼쳐놓으며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각박한 현실을 살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육룡이 나르샤’는 조선의 기틀을 세운 철혈 군주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여섯 인물의 야망과 성공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다. 지난 5일 첫 방송을 한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적절히 녹인 ‘팩션 사극’을 표방하고 있다. 인물과 장치, 풀어나가는 이야기에 허구를 입혔지만 기본적인 토대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다고 고루하고 추상적인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고려 말의 시대적인 정치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과 맞닿아 있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지금의 정치 속 누군가가 겹쳐지기도 한다. 정치 권력이 대의와 명분을 가지고 공허하게 대립하는 사이 민초들은 피고름을 짜는 역사, 수백년이 지난 지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현재까지는 민초를 먼저 생각하는 정치인, 실천을 마다하지 않는 정치인인 정도전(김명민 분)이 원나라와의 수교를 막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을 벌이는 모습을 다룰 때 시청자들은 실제 영웅을 만난 것마냥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지난 6일 방송된 2회에서 정도전이 자신의 이속을 챙기느라 나라 전체를 전쟁의 도가니로 빠뜨리려고 하는 이인겸(최종원 분)의 뒤통수를 치고 원나라 사신의 입도를 막는 과정은 우리가 현실에서 찾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과 같았다. ‘육룡이 나르샤’는 정도전을 뛰어난 계략가이자, 탁상공론을 박찰 수 있는 곧은 신념과 용기를 가진 정치인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모두의 우려를 깨고 일단 대의와 실리를 모두 챙긴 반전의 전략은 답답했던 속을 뚫어주는 통쾌 그 자체였다.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 안에 현실 정치인이 아니라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이 꼽히는 현실, 정치에 기대를 품기 보다는 실망하고 분노하는 일이 많은 현실. 사는 게 팍팍해서, 그리고 희망을 품기 쉽지 않아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일이 많은 요즘 ‘육룡이 나르샤’ 속 정도전과 신진사대부가 꿈꾸는 이상향은 역사 뿐만 아니라 지금도 거대한 환상으로 느낄 수 있다. 오죽하면 지옥의 대한민국이라는 자조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일까.
정치를 주제로 하는 사극은 아무래도 현실과의 기시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두루뭉술한 추상을 다루다 보면 오히려 지루한 이야기가 되기 일쑤인데, ‘육룡이 나르샤’는 뚜렷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역사인 듯, 현실인 듯 현명한 줄타기를 하며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중이다. 무엇보다도 급진적 개혁이라는 카드를 택하며 썩어빠진 고려를 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정도전의 강한 돌진에 박수를 치게 만든다. 언제나 존경하고 싶은 지도자의 출현을 꿈꾸며 드라마 속 인물에 감정 이입을 하게 되는 안방극장에 몽상을 멀리하고 실천과 참여라는 적극성이 필요하다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 jmpyo@osen.co.kr
[사진] '육룡이 나르샤'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