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과 후손들의 인식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법. 하지만 '조선시대 최악의 왕은 누구?'라는 질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간신들에게 휘둘린 '팔랑귀' 왕, 아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몰인정' 왕, 외세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항복한 '지질이' 왕, 바로 인조다.
이런 '루저'를 드라마에서 매력적으로 그려 낸 이는 배우 김재원이다. 그는 최근 종영한 MBC 월화 사극 '화정'에서 광해군(차승원 분)의 동생 능양군으로 독기 서린 삶을 살다가 인조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로 분했다. 비열하고 무능하면서 야망이 큰 왕을 연기하며 연기 변신을 꾀했다.
결과는 대성공.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유행어를 만든 김하늘의 파트너로 멜로 드라마의 대표 남자 주인공이었던 그는 이번 '화정'으로 연기력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루저', '외톨이', '센 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인조를 김재원은 왜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했을까?
지난 5일, 그를 만났다.
"인조가 악역이라면 악역일 테지만 사실 전 선과 악에 대한 구분을 두지 않았어요. 그런 이분법적인 표현은 단순한 거잖아요. 인조가 가진 여러 성향과 업적을 후손이 악인이라고 평가한 건데 다른 각도로 봐 주셨으면 해요. 잘하고 싶었는데 안 좋은 환경 때문에 원치 않은 결과를 낸 거라고요."
선조의 손자이자 원종의 아들인 인조는 '배 다른 작은 아빠' 광해군의 견제 때문에 아버지도 형제도 집도 잃고 풍비박산 된 환경에서 자랐다. 모든 걸 빼앗긴 상태로 독기 오른 청년 능양군 시절을 보냈고 결국 광해군 재위 15년(1623)에 반정에 성공했다.
"공부해 보니 인조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의 인물이더라고요. 주변과 어울리지 못해 현대적으로 보면 사이코패스처럼 성장했다고 봐요. 최악의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악만 남은 거죠. '어떻게든 왕이 되겠다, 복수하겠다'는 심정으로요. 그릇된 과욕과 야망 때문에 틀린 선택이란 걸 알면서도 간신들과 손을 잡은 것 같아요. 그의 곁에 간신들이 아닌 올바른 가이드가 있었다면 인조도 달라졌겠죠."
김재원의 '인조학' 강의(?)를 듣고 나니 '루저왕'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바뀌었다. 짧은 인터뷰에도 사람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김재원의 화술이 대단했을까? 아니다.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인조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했으며 촬영 내내 인조로 살았기에 애정어린 시선으로 평가하게 된 그다.
"촬영 후반부에 감독님께 얘기했어요. 다시는 아픈 연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요. 인조의 아픔을 연기하려다 보니 실제로 아팠거든요. 왜 그렇잖아요. 아프다는 생각을 계속 하면 진짜 아프게 되는 거요. 말년에 인조가 가진 병상은 뭘까, 그의 팔자를 오행으로 풀어 보니 신체적인 취약점이 있더라고요. 거기가 유난히 아프다고 생각했다더니 진짜 아파서 고생했네요."
그도 그럴 것이 김재원은 '화정'에서 성질을 부리지 않은 적이 한 회도 없었다. '버럭남'이라는 애칭까지 얻을 정도. 순한 인상의 그가 맨날 화만 내고 패악질을 부리는 인조를 연기하기에 에너지 측면에서도 버거웠다. 그래서 오히려 김재원은 인조에 대한 연민이 생긴 듯하다.
"분노 연기 정말 힘들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화를 내며 살았을까 싶어요.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살고 싶지만 주변 환경이 따라 주지 않는 상황이라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 같아요. 인조는 정말 힘들게 사신 분이죠. 아는 만큼 무언가를 결단 내리고 선택하게 되기 마련인데 내 영역이 넓어질수록 결정 권한이 많아지는 거잖아요. 왕이 되니 할 게 많더라고요. 정말 피곤한 위치에요. 전 왕 같은 거 시켜 줘도 안 할래요!" (인터뷰②에서 이어집니다) /comet568@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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