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괜찮다’며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은 두 편의 힐링 영화가 가을 극장가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 맷 데이먼 주연 SF 영화 ‘마션’과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 ‘인턴’이다. ‘인턴’ 보다 2주 뒤 개봉한 ‘마션’은 벌써 300만 명을 넘어섰고, ‘인턴’도 280만 명으로부터 ‘합격증’을 받았다.
초대박까진 아니지만 두 영화가 2015년 가을, 한국 관객을 사로잡은 비결은 뭘까. 끊임없는 위트와 기분 좋은 유머, 그리고 손난로 같은 따스함 덕분이라는 생각이다. 화성에 홀로 남아 500일간 자급자족하며 구출을 기다린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화성판 삼시세끼’를 찍으며 고대하던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 귀환에 성공한다.
보란 듯 사업체를 키운 30대 여성 CEO가 70대 시니어 인턴을 받으며 뜻하지 않은 인생 공부를 하게 된다는 내용의 ‘인턴’도 많은 공감과 온기를 객석에 전파하며 네티즌 평점 9점대를 획득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줄스(앤 해서웨이)가 자신을 대신할 전문 경영인 영입을 놓고 고민에 빠지고, 믿었던 남편의 바람과 원인 제공에 대한 자책 때문에 아빠 같은 부하 직원 벤(로버트 드 니로) 앞에서 펑펑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함께 훌쩍이는 이들이 많았다.
두 영화는 신기하게 안타고니스트를 활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묘하게 닮았다. 보통 주인공의 극적 갈등과 멋진 해결을 도드라지게 보여주기 위해 거의 모든 극에 안타고니스트를 내세우기 마련인데 두 작품 모두 이 전략을 과감히 생략한 것이다. ‘드라마틱’을 위해 다소 전형적이고 MSG인 줄 알지만 첨가할 수밖에 없었던 악역을 레시피에서 과감히 뺀 세련된 용감함으로 볼 수 있다.
인터넷 평점 코너에 간간이 ‘지루했다’ ‘생각보다 별로였다’며 1점 콩알탄을 던지는 네티즌의 불평은 바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이 없는 두 영화의 착한 서사 구조와 무관치 않다. 초 긍정주의 와트니가 동료들과 갈등을 빚고 그를 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천문학적 비용 때문에 누군가의 훼방에 주인공이 휘말려야 하는데 ‘마션’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다.
오히려 화성 탐사선 아레스3 대장 멜리사 루이스(제시카 차스테인)와 동료들은 와트니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첫 번째 역발상이 등장한다. 지구에 근접한 자신들이 화성으로 돌아가 와트니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에 내부 동요가 벌어질 줄 알았지만 정 반대였던 거다. 보통 이 과정에서 명분과 실리가 충돌하고 팀원 간 대립이 발생하지만 이들은 동료애 앞에서 누구하나 군소리 없이 우주 유턴에 동의한다.
NASA가 있는 휴스턴 기지 상황도 마찬가지. 과거 같으면 최고 책임자 정도 되는 Mr. 냉정한이 “와트니를 버리고 오라”고 지시해 관객의 분노 게이지를 높일 텐데 그런 설정이 없다. “다 같이 그를 구하자”며 교과서적 태도를 보일 뿐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악역이라면 화성을 마비시키는 모래 폭풍 정도다.
훼방꾼이 없기는 ‘인턴’도 같다. 이 영화에는 줄스에게 시니어 인턴 제도를 활용해 회사 이미지를 향상시키자고 제안하는 넘버 2가 나온다. 투자자들의 의견이라며 전문 경영인을 스카우트 해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가 분명 줄스를 궁지로 몰아넣는 적수인줄 알았지만, 역시 아니었다. ‘인턴’에는 단 한 명의 악역이나 분란을 조장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영화 전문가들은 “마션은 그간 세상을 어둡게 조명해 온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기존 영화 보다 확실히 몇 배 밝아진 면이 있다”며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지만 그 보단 낙오자에 대한 노장의 온정적인 시선으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고 해석한다.
‘인턴’ 역시 신구 세대의 공존과 경험으로 상징되는 아날로그의 가치,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는 메시지를 주는데 주력할 뿐 판에 박힌 안타고니스트 전략을 애초부터 접은 것으로 보인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확신이 섰다면 전형성과 자질구레한 플롯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두 영화가 보여준 사례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넘어져 인생 낙오자가 될 위기에 처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마션’과 ‘인턴’은 어떤 식으로든 낙오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형광펜을 긋는 작품이며, 이런 울림에 관객들이 시간과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기꺼이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다./bskim012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