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이쯤 되면 스릴러계 요정이라는 말까지 등장하지 않을까. SBS 드라마 ‘추적자-더 체이서’(12)를 시작으로 영화 ‘숨바꼭질’(13) ‘악의 연대기’(15)에 이어 ‘더폰’까지. 송강호 하정우 부럽지 않은 손현주 전성시대가 4년째 펼쳐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를 먹여 살린 건 에로와 깡패 영화였다. 사람들이 욕 하면서도 건달 영화에 지갑을 연 건 그 안에 액션 뿐 아니라 스릴러적 요소가 담겼기 때문이다. 한국에 볼 만한 갱스터 무비가 전무하던 시절, 그 대체제가 돼준 게 바로 깡패 영화였던 것이다.
스크린을 피로 물들인 이런 건달 영화들은 ‘투캅스’ 류의 형사 영화와 경쟁하는 듯싶더니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웨스턴 장르와 웰메이드 스릴러 ‘추격자’가 나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얘기 되는 드라마와 명품 배우들의 호연이 버무려진, 제대로 된 스릴러가 관객 눈높이를 높이며 벌어진 이유 있는 ‘퇴장’이었다.
손현주가 관례를 깨고 세 편 연속 스릴러에 출연한 건 요즘 관객 취향과 세태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결과다. 두 시간 만이라도 재미없고 루틴한 일상에서 벗어나 좀 더 강력한 마취제가 필요한 요즘 관객들의 선택과 맞물리는 지점인 것이다.
예상과 달리 남자 보다 20~30대 젊은 여성들이 흉악범을 소재로 한 스릴러의 주 고객이란 점은 다소 서글프게 다가온다. 그만큼 세상이 건조하고 섬뜩해졌으며, 여성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역설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말랑말랑한 이야기가 유효하겠지만 핏빛 낭자한 리얼리스트 영화의 인기 역시 당분간 이어질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더폰’(김봉주 감독)은 아귀가 잘 맞는 그래서 기막힌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는 명품 스릴러는 아니다. 감독도 이런 사실을 고백하듯 로펌 변호사 고동호(손현주)를 통해 “이게 말이 안 되는데 말이 돼”라는 대사를 두 번이나 반복한다. 1년 전 눈앞에서 살해된 경림 엄마(엄지원)가 뜬금없이 “여보, 오늘 몇 시에 들어올 거야”라며 안부 전화를 걸어오다니.
영진위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상금 2000만원을 거머쥔 ‘더폰’은 기발한 아이템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현재의 사투를 통해 1년 전 그날의 잘못을 바로 잡으며 죽은 아내를 살릴 수 있다는 ‘심폐소생’ 스토리는 충분히 무릎을 칠 만하다. 비과학적인 허무맹랑한 소재를 얼마나 개연성 있는 드라마로 발전시키느냐가 이 영화의 승부처일 텐데 제작진은 영리하게 ‘손현주 찬스’를 쓰며 위험지대를 벗어난다.
80% 이상 화면에 나오는 손현주의 매력은 평범하며 일상적인 느낌을 주지만 관객을 서서히 스토리로 빠져들게 한다는 점이다. 가공할 폭발력은 없지만 죽은 아내를 살려내기 위한 그의 고군분투는 안타깝고 서글프고 어느 순간 망이라도 봐주고 싶어진다. 가족을 지키려는 그의 처절함이 마치 안구에 터진 실핏줄로 투영된다고 할까.
분명히 ‘숨바꼭질’ ‘악의 연대기’에서 본 것 같은 상황과 표정이 나오지만 전작을 잊게 만드는 손현주의 힘은 역할과 동기화될 때 비로소 나오는 진정성일 것이다.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상품성을 향상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장르를 갈아타지만 손현주 표 스릴러가 쉽게 물리지 않는 이유는 그가 동어 반복적 연기 패턴에 의지하지 않고 매 작품마다 정성을 다한 연기를 끝까지 뿜어내기 때문이다.
기존 그가 나온 스릴러와 차별점이라면 비주얼에 돈을 썼다는 점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촬영한 연등행렬과 청계천 추격신은 축제 속 사투라는 아이러니와 뒤틀림, 긴박감을 주며 영화를 풍성하게 해준다. 엔딩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겠지만 대세엔 지장이 없겠다. 15세 관람가로 22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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