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피부와 선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처연한 듯한 갈색 눈동자는 그 언젠가 우리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벌써 방영된 지 10년도 넘은 드라마 ‘러브레터’ 속 안드레아 신부로 분했던 조현재의 모습은 여전히 대중들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배우로서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하는 욕심은 당연한 것. 이에 조현재는 SBS ‘용팔이’에서 권력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악인 한도준 역을 택하며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섬뜩한 면모를 드러냈다.
“어렸을 때부터 악역을 해보고 싶었어요. 제 이미지 때문에 악역 위주의 작품은 들어오지도 않았고 시켜주시지도 않았거든요. 물론 저한테는 하나하나 배역이 소중하고 감사하죠. 다만 ‘러브레터’가 끝나고 반항아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반항아라고 해서 들어갔는데, 찍기 직전에 대본이 전면 수정돼서 저의 기존 이미지에 맞는 역할로 돌아간 적도 있었어요.”
사실 조현재는 ‘러브레터’ 이후 꾸준히 작품을 해왔지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남긴 히트작은 드물었다. 그 와중에 방송 6회 만에 시청률 20%를 돌파하며 압도적인 화제성을 자랑한 ‘용팔이’를 만남과 동시에 파격적인 연기 변신까지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을 터.
“‘용팔이’는 저에게 특별한 드라마죠. 우선 결과도 좋았고, 처음 시도해보는 캐릭터였잖아요. 대중들의 반응이 좋아서 뿌듯하고 제 필모그래피에도 좋게 남을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런 캐릭터를 만나서 반가워요. 이전에는 순수하고 반듯한 청년 이미지가 강했는데, 지금 이 타이밍이 제가 20대의 아이돌스러움을 벗을 수 있는 시기인 것 같아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죠.”
‘용팔이’가 배우 인생에서의 터닝 포인트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채 여물지 못했던 지난날의 연기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20대 때에는 정신없이 쉬지 않고 일을 했었고, 제가 가장이다 보니 일을 계속 해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솔직히 연기에 대한 욕심이 지금보다 덜 했던 것 같아요. 사는 게 각박해서. ‘그 당시에 지금의 지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물론 지금도 연기에 대해서 100% 만족하지는 않지만, 20대 때가 조금 더 아쉬워요.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큰 역할을 맡기도 했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개인적인 부담도 있어서 집중도가 지금보다는 약했죠.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소중히 생각하고 더 열정을 쏟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확실히 30대가 되고 연륜과 노하우가 쌓인 덕일까. 한도준 캐릭터는 그간의 조현재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인 역할에도 제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느낌이 있었다. 누워있는 김태희를 향해 ‘밖에는 너 하나 알현해보자는 것들이 줄줄이다’라고 비꼬며 악마 같은 웃음을 짓는 모습으로 소름을 유발하기도 했다.
“캐릭터에 일관성을 주려고 집중을 많이 했어요. 악하면 더 악하게 표현하려고 했지만, 다른 드라마의 악역이랑은 다른 것 같아요. 한도준은 결핍이나 콤플렉스가 더 많아요. 극 중에서도 채영(채정안 분)을 엄청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사람한테 사랑을 못 받았을 때 악행이 시작되는 거죠. 그런 점에서 다른 악역이랑은 다르게 가야한다고 생각했어요. 한회장(전국환 분)은 도준의 친아버지임에도 명예와 돈에만 집착하고 살아왔던 분이기 때문에, 도준은 늘 소외당했고 악행을 저지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죠.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조현재의 연기 변신 성공과 함께 ‘용팔이’는 마지막까지 20%대 시청률을 유지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배우에게 시청률이란 성적표와 같은 존재. A+급 성적표를 받은 당사자인 조현재의 생각은 어떨까.
“배우로서 가장 가치를 두는 결과물이 시청률은 아니에요. 저는 제가 연기했던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들의 응원과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거기에 시청률까지 좋으면 최상이죠. 3박자가 맞듯이 다 따라오는 부분인 것 같아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아련한 첫사랑에서 이제는 나쁜 남자의 매력까지 보여주며 앞으로도 사랑 받을 배우임을 입증한 조현재의 차기작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다. 그는 다음엔 어떤 모습으로 시청자의 곁을 찾아올까.
“아직까지 결정된 건 없어요. 이번에는 악역을 했으니 다음에는 어리바리하거나 위트 있고, 장난기 있는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요. 어울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연구해보고 싶기도 해요. 망가질 수도 있어요. 그런 거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적나라한 노출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아요.” / jsy901104@osen.co.kr
[사진] 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