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사람들은 왜 영화를 보고 어떤 영화에 희열을 느끼는가. 개인의 취향과 다양한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두 가지 최대공약수는 확실해 보인다. 바로 새로운 볼거리와 매력적인 이야기를 갖출 것.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충실하더라도 관객은 고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기 위해 얼마든지 판타지에 빠져들 용의가 있다.
한 무명 프랑스 곡예가가 벌인 희대의 예술 범죄 사건을 스크린에 옮긴 ‘하늘을 걷는 남자’(The Walk)는 전에 보지 못 한 새로운 화면과 그림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단 시선이 간다. 1974년 412m 높이의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두 건물을 와이어로 연결해 그 위를 걷는 프랑스 아티스트 필립(조셉 고든 레빗)의 이야기다.
3D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보는 123분간 나도 모르게 두 번 이상 고개를 돌려야 했다. 수직 절벽 같은 고층 건물을 로우 샷으로 잡은 장면에서 뭔가가 빠르게 낙하할 때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게 된 것이다. 만약 이 모습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봤더라면 얼마나 통쾌해할까 싶어 금세 멋쩍어졌다. ‘백 투 더 퓨처’ ‘포레스트 검프’로 명성을 쌓은 뒤 ‘베오 울프’ 이후 3D 영화에 사활을 걸고 있는 그가 아닌가.
시각적 쾌감을 위해 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하걷남’은 때리고 부수고 합체하는 ‘트랜스포머’ 류의 블록버스터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관객을 긴장시키고 진땀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후반 40분간 펼쳐지는 필립의 고공 미션 도전 모습은 오락적 재미를 넘어 한 인간의 엄숙하고 숭고한 예술혼까지 경험하게 해주는 명장면이다.
전작 ‘인셉션’에서 무중력 상태의 고강도 액션 신을 대역 없이 소화해낸 조셉 고든 레빗은 이번 영화에서도 중력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외줄타기 연기를 통해 또 한 번 관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절대 아래를 봐선 안 되는 아찔한 높이에서 평형봉만 든 채 42m의 길이, 2cm의 폭 위를 걷는 그의 아슬아슬함은 컴퓨터그래픽이고 무사할 걸 알면서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생경한 그림이 빚어내는 아드레날린 분비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무모하고 험난해 보이는 한 곡예가의 고층빌딩 밧줄 횡단은 충분히 갈채 받고도 남지만 이걸 굳이 3D 영화로 봐야할 지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감독도 취약한 드라마를 보강하기 위해 케이퍼 무비 형식을 취하지만,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주인공의 ‘무한도전’과도 썩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필립은 쿠데타로 정의내린 자신의 퍼포먼스를 위해 준공을 앞둔 월드 트레이드 센터 건설 현장 인부로 위장하고, 자신을 지지해준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옥상까지 진출하지만 그 과정이 다소 건조하게 펼쳐진다. 실존 인물의 고증을 따라간 것까진 좋으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상업용 픽션이란 점에선 좀 더 풍부한 극적 상상력과 카타르시스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이는 페팃의 자서전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와 2009년 아카데미영화제 다큐멘터리 수상작인 ‘맨 온 와이어’를 존중한 태생적 한계일 것이다. 그럼에도 두 전작의 3D 버전 정도로 밖에 이 영화가 다가오지 않는 건 주인공의 고군분투와 전율을 뒷받침해주는 주변 인물 관계와 주인공의 심리 변화, 서사의 빈약함 때문이다.
이런 허전함은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같은 눈물겨운 인간애를 다룬 작품의 연출가로 한때 휴머니즘 계열의 대표 감독으로 꼽힌 저메키스의 기다리던 신작이라 더 크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플라이트’ 이후 2년 만에 컴백한 그가 3D에 투자한 시간과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각색에 신경 썼더라면 어땠을까 아쉽다.
제53회 뉴욕영화제 개막작으로 호평 받았으며 지난 2001년 9.11 테러로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란 점에서 미국인들에게 마냥 웃으며 볼 수 없는 각별한 영화가 됐다. 12세 관람가로 2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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