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을 논하던 든든한 동지와 스승에서 극악무도한 변절자가 되어 버린 남자, 홍인방. 그는 “날아보기 전엔 내가 닭인지 새인지 모르고, 나 역시 내가 무엇인지 몰랐다”며 어린 이방원에게 악과 선을 구분 짓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렸다. 이에 어린 이방원은 “적어도 선하기 보단 정의롭고자 한다. 정의는 악을 용납치 않는다. 악을 방벌함으로서 정의롭다”고 소리쳤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등을 돌렸고, 제자는 끝까지 스승의 손을 잡지 않았다.
배우 전노민은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극본 김영현 박상연, 연출 신경수)에서 이 홍인방을 연기하고 있다. 홍인방은 한 때 정도전(김명민 분)과 함께 고려의 개혁을 주도한 사대부였으나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유배에서 돌아와 변절을 택했다. 악랄한 모략으로 단숨에 고려 최고의 실세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 야심가다. 그는 또 하나의 권력가인 길태미(박혁권 분)와 사돈을 맺었고, 잠깐이었지만 고려 최고의 권력 실세인 이인겸(최종원 분)을 좌지우지 하기도 했다.
“인(仁)이란 씨앗이고 생명이다. 인한 마음이란 살아 꿈틀거리며 만물과 소통한다”며 더욱 살아 움직이라고 성균관 유생들을 가르치던 스승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절대 악인으로 다시 태어난 홍인방에 이방원(아역 남다름/유아인 분)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홍인방의 악행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반응은 더욱 뜨거워졌다. 지난 10일 SBS 일산제작센터에서 만난 전노민 역시 이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 캐릭터가 이렇게 이슈가 될 지 몰랐다. 그래서인지 분장팀에서 사람 때리고 소리 지르고 화내는 것이 꼭 생활 연기 같다며 놀리기 일쑤다”라고 전하고는 크게 웃었다. 또 그는 “영화 쪽 관계자들에게서 전화가 많이 온다. 여태까지 한 거 중에 제일 낫다는 말씀을 해주신 분도 있다”고 홍인방을 향한 뜨거운 반응을 설명했다.
평소 바르고 선한 인상과 중후한 이미지 때문에 악역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렇기에 이번 역할은 부담보다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더 강했다고 한다. 전노민은 “맨날 똑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걸 뒤집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나쁜 역할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고정관념 같았고, 이걸 깨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어 전노민은 “사실 웃으면서 때리면 맞는 사람은 더 화가 나기 마련이다. 반면 악하게 생긴 사람이 때리면 당연하거나 평범하지 않나. 세게 때리는 것보다 웃으면서 건드리는 것이 더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고 자신이 악역을 맡은 것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전노민 역시 홍인방이 이 정도의 악역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고. 다만 김영현, 박상연 작가와 신경수 감독에게 “평범한 악역보다 또라이 미친놈처럼 해달라. 정말 못 되게 해달라”라는 부탁 하나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위해 배려를 해준 김영현, 박상연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고백했다.
“홍인방이 변화되는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처음엔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는데 이 정도로 전환이 된다면 좀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씀을 드렸더니 작가님이 새로 대본을 써주셨다. 그게 바로 3회에 등장한 화사단 장면이다. 정말 고마웠다. 이미 나와 있는 대본을 평범한 것 같다는 말 한 마디에 다시 써준 건 정말 굉장한 배려다. 앞으로 배우 생활을 하는 동안 절대 못 잊을 것 같다.”
사실 전노민과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인연은 상당히 깊다. ‘선덕여왕’에 출연한 바 있는 전노민은 ‘뿌리 깊은 나무’에도 특별출연을 해 의리를 지켰고, 이번 ‘육룡이 나르샤’ 역시 함께 하게 됐다. 전노민의 설명에 따르면 2년 전 이미 시놉시스를 받았다고. 물론 그 때는 홍인방이 아닌 정몽주였고, 이번에 SBS로 편성을 받으면서 홍인방을 맡게 됐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작가님께서 많이 믿어주셔서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계속 이렇게 기억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촬영 중에 작가님과 통화를 한 번 했었는데 ‘김명민 씨와 함께 한 신을 보면서 정말 깜짝 놀랐다’는 말씀을 해주시더라”고 다시 한 번 고맙고 기쁜 마음을 드러냈다. /parkj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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