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석진에게 있어 환자는 목적이 아닌 도구였다. 첨단 로봇수술 권위자로 병적일 정도로 검사에 의존하며 높은 수술성적을 자랑하는 그에게 이경영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잘나가던 자신을 무력한 의사로 만든 재난 앞에서 그는 더 이상 기술자가 아닌 진짜 의사의 길을 택하게 됐다.
이런 그에게 운명은 참 가혹했다. 바로 유전적 안과질환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 지난 13일 방송된 JTBC 금토드라마 ‘디데이’(극본 황은경, 연출 장용우)에서는 잃어가는 시력 때문에 결국 미래병원을 떠나고 마는 우진(하석진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날 우진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술을 컵에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부딪혀 쓰러지는 등 질환이 점차 악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우진은 “이날이 오지 않기를, 그래서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그래서 내 로봇 수술법 완성시키고 떠나고 싶었다. 분해서 미치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내가 왜 여기서 허무하게 무너져 내려야 되는데. 안 보이는 눈으로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어머니 고생 그만하게 해드리고 싶었다”며 좌절했다. 이런 그에게 지나(윤주희 분)는 눈이 되어주겠다며 위로했다.
지나를 비롯해 힘이 되어주는 미래병원의 동료들이 있기에 버틸 수 있었던 우진이었지만 건(이경영 분)의 존재는 결국 그가 병원을 떠나게 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우진은 자신의 눈 상태를 핑계로 분명 해성(김영광 분)에게 영탁(여무영 분)의 수술에 대한 책임을 물을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건은 앞서 우진의 상태를 명현(고규필 분)을 통해 귀띔 받은 바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진과 마주친 건은 자신이 가야 할 층의 버튼을 눌러달라고 부탁했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력 탓에 정확하게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우진은 긴장했지만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우진은 자신의 상태를 건이 눈치 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병원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는 사직서와 함께 “지쳤습니다. 쉬고 싶습니다. 도망자라고 해도 패배자라고 해도, 무책임하다고 해도 좋습니다. 모두에게 죄송합니다”란 내용의 편지를 남긴 채 종적을 감췄다.
병원을 떠난 그가 찾아간 곳은 바로 홀어머니가 계신 고향 집이었다. 우진이 들어오는 발소리에 어머니는 한 걸음에 달려 나왔다. 지진이 난 서울에 남아있을 아들이 걱정되면서도 눈 때문에 쉽사리 찾아 나설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연신 쓰다듬으며 걱정했고, 우진은 “그래서 왔잖아. 나 잘 있는지 보여주려고”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눈이 보이지 않는 어머니와 그 유전병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고 병원을 떠난 우진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어머니에 대한 책임감과 살려야 할 환자들을 향한 사명감이 남아 있다. 점점 좁아지는, 잘 보이지 않는 시야에 좌절하고 이대로 무너질 그가 아니란 것이다. 더 이상 검사 수치가 아닌, 손끝으로 느껴지는 환자의 체온과 질환에 집중하며 진짜 명의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면 우진에게 있어 재난은 무엇과도 바꿀 없는 선물이 될지도 모른다. 하루빨리 병원으로 돌아 와 다시 의사가운을 입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길 바래본다.
한편 '디데이'는 서울 대지진, 처절한 절망 속에서 신념과 생명을 위해 목숨 건 사투를 벌이는 재난 의료팀의 활약상을 그린 드라마. 매주 금, 토요일 오후 8시 30분에 방송된다. / nim0821@osen.co.kr
[사진] ‘디데이’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