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베트남 여성들이 모인 방 안, 그 앞에 서너 명의 중년 남성들이 앉아있다. 이들은 눈에 들어오는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하러 나선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함께 밥을 먹고, 시내 데이트를 즐긴다. 그리고 몇 천만 원이라는 돈을 지불하고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한다. 흔히 알려진 매매혼의 과정이다.
시작부터 필요에 의한 거래 같은 만남.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이지만 인생에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듯, 사랑에도 그 법칙은 어김없이 적용됐다. 지난 14일 오후 방송된 KBS 2TV 드라마스페셜 2015 시즌3의 네 번째 작품‘ 비밀’(연출 전우성, 극본 차연주)에서는 오해와 편견으로 얼룩진 매매혼이 빚어낸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파를 탔다.
어느 날 건설 현장에서 한 남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는 술과 가정폭력을 일삼는다며 소문이 좋지 않았던 철주(김태한 분)의 사체였고, 평소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던 베트남 신부 띠엔(서은아 분)가 용의자로 몰려 공항에서 경찰서로 잡혀왔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평생 누구에게도 사랑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표현이 서툰 철주였지만 그는 띠엔을 마주하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목에 화상자국이 있어 인력소개소에서 하자 취급을 받던 띠엔에게 그는 아무 말 없이 스카프를 무심하게 건넸고, 한국으로 들어와 달동네에 위치한 집까지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오르는 띠엔에게 슬리퍼를 사서 신기는 등 철주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무뚝뚝하기만 한 줄 알았던 철주의 따뜻한 마음씨에 띠엔 역시 그를 사랑하게 됐다. 3개월 안에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찾아 철주를 버리고 나오라는 인력소개소의 남자의 계속되는 협박에도 띠엔은 이를 거절하고 철주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띠엔이 남자에게 협박을 받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철주는 인력개발소를 찾았다. 그곳에서 철주는 띠엔이 위장결혼을 했단 사실을 알게 됐고, 남자는 “걔가 뭐 당신 좋아서 결혼했겠냐. 돈 벌고 국적만 따봐라. 당신 같은 늙은 놈이랑 왜 붙어있냐”며 띠엔의 진심을 왜곡했다. 이에 철주는 할 말을 잃은 채 발길을 돌렸고, 가슴 아픈 눈물을 흘렸다. 인력개발소를 다녀 온 후에도 철주는 띠엔과 함께 살며 아이를 낳았고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철주는 띠엔을 한국국적으로 귀화시켜 주지 않은 채 여전히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띠엔은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철주를 빨리 그만두게 하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노력 끝에 한국어 교사가 됐다.
어느 날 철주가 파견을 간다며 짐을 싸 집을 나섰다. 그가 집을 비운 사이, 남자들이 찾아 와 띠엔에게 빚 상환을 독촉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띠엔은 어리둥절해 했고, 이내 철주가 그의 외국인 등록증으로 카드를 발급받고 대출을 받아 큰 빚을 지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돼 충격에 빠졌다. 게다가 철주는 이미 건설 현장을 그만 둔지 오래였다. 이런 사실이 모두 드러난 가운데 철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일을 추궁하는 띠엔에게 철주는 목숨을 걸고 모든 걸 찾아오겠다고 다시 집을 나가며 함께 베트남에 가자고 약속했다.
이것이 띠엔이 본 철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철주가 빚을 지게 된 건 모두 과거 그와 같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지금은 기술시공 대리가 된 재민(허지원 분)의 계략 때문이었다. 그는 자격증 없이 건설현장에서 두 배로 돈을 벌며 작업반장까지 할 수 있다며 철주를 꼬드겼고, 결국 꼬임에 넘어간 철주는 투자 계약서를 작성했다. 뿐만 아니라 재민과 그 일당들에게 자신과 띠엔의 신분증, 통장까지 넘겨줬다. 믿었던 재민에게 배신당한 철주는 그를 찾아갔고, 돈을 돌려받았다. 하지만 철주에겐 돈 보다 띠엔의 외국인 등록증이 더 중요했다. 이를 돌려달라고 말하는 철주에게 재민은 “진짜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냐”며 “아저씨 주제를 알라”는 말을 내뱉었다.
이런 재민은 철주와 마찬가지로 베트남 신부와 결혼했지만 띠엔과 달리 3개월 만에 신부가 모든 걸 챙겨 도망간 일을 겪은 바 있었다. 이에 그는 “저런 무식한 놈은 띠엔 같은 여자 만나고, 나는 3개월 만에 다 튀고 도망가고. 나랑 똑같이 당할 거야”라며 악담을 퍼부었고, 철주는 띠엔은 다르다며 함께 베트남으로 떠나기로 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철주가 공항으로 가기 위해 돌아서는 모습에 재민은 순간적인 충동에 휩싸여 그를 뒤에서 찔렀다. 결국 철주는 공항으로 향하지 못하고 마지막 순간에 띠엔의 신분증을 손에 쥔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띠엔은 경찰이 보관하고 있던 철주의 유품을 건네받았다. 그 안에는 띠엔이 철주에게 건넸던 파스가 스카프 안에 고이 싸여 보관되어 있었고, 띠엔이 남긴 쪽지, 글을 읽을 줄 몰랐던 철주가 띠엔의 이름을 정성스레 연습한 공책 등이 들어 있었다. 비록 다정한 말은 건넬 줄은 몰랐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던 철주가 남긴 흔적에 띠엔은 가슴 아픈 눈물을 흘렸고, 그렇게 그를 추억했다.
분명 두 사람의 만남은 돈이 오가는 철저한 거래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피어난 사랑은 돈이나 신분증과 같은 것들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누구도 섣불리 오해와 편견을 얘기할 수 없는 관계였다. 나이와 국경을 뛰어 넘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이들의 이야기는 비록 가슴 아프지만 따뜻하게 가을밤을 물들였다. / nim0821@osen.co.kr
[사진] ‘비밀’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