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턴'(낸시 마이어스 감독)이 한국 관객들에게 유독 강한 지지를 끌어낸 것은 누가봐도 존경하고 의지할 수 있을만한 지혜로운 어른 벤 휘태거(로버트 드 니로 분)의 존재 때문이었다. 벤 휘태거는 인생을 살아오며 쌓인 지혜로 어린 상사 줄스(앤 해서웨이 분)를 자상하게 격려했고, 보는 이들은 줄스만큼 위로를 얻었다. 그래서 '인턴'은 '판타지'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 노신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완성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난 12일 언론배급시사회를 공개된 영화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정기훈 감독) 속 상사 하재관은 벤 휘태거의 대척점 저 끝에 서 있는 인물이다. 어쩌면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도라희(박보영 분)에게 하부장은 이 사회의 총체적 부조리함을 한 몸에 담고 있다고 보여질지 모르는 인물이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취업난의 끝,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언론사에 들어간 도라희(박보영 분)가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듯한(?) 연예부 부장 하재관(정재영 분)의 밑에 들어가 수습기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하재관은 첫 만남부터 강렬한 '포스'를 내뿜는다. 누군가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면서 전화기를 부수는 것은 예사다. 입만 열면 욕을 내뱉고, 열심히 써 온 기사를 박박 찢어버린다. "쉬는 날이 하루도 없느냐"는 수습의 질문에 "열정이 있으면 못할 게 뭐가 있느냐"고 '꼰대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 뿐인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사무실 전체를 돌며 인사를 시키고, 막상 인사를 하면 "가슴이 보인다"며 성희롱성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사다.
그런 하재관 밑에 들어간 도라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치우는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반발을 하기도 하고, 도발적인 질문을 내뱉기도 하는 도라희지만 결국에는 그도 "지금은 네 느낌, 생각, 주장 다 필요없다. 대화가 될 때 들어주는 거다. 네 생각을 드러내지 말라"거나 "하부장은 지 새끼들 밥그릇 챙기겠다는 소신이 있다"는 직속 선배 선우(배성우 분)의 조언을 따라 조금씩 타협점을 찾아간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이처럼 지독히 현실적인 영화다. 주인공 도라희가 겪는 일들은 비슷한 또래 20~30대 사회초년생들이 겪을 법한 일들이다. 그 속에 존경할만한 어른 혹은 본보기가 될만한 사람은 없다. 다만, 함께 '밥그릇'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보통의 어른들이 있다. 그들은 어린 도라희가 그러하듯 절대적인 악인도, 선인도 아니다. 순간순간의 여건에 따라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고, 그 결과가 좋은 영향을 미칠 때도 있고 나쁜 영향을 미칠 때도 있다. 물론 영화의 말미에는 하재관이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부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행했던 이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부조리함이 해결됐을 때의 카타르시스 대신 모두가 겪어봤을 일들에 대한 깊은 공감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그 속에서 코미디가 만들어 지고, 웃음을 준다. 정재영과 박보영의 연기는 독보적이다. 특히 드라마 '어셈블리'의 영웅 정재영이 같은 재료들로 전혀 다른 역할을 해내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크다. 언론사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도 영화가 현실감을 주는 것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보게 한다.
한편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오는 25일 개봉한다. /eujenej@osen.co.kr
[사진]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