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도박판의 최종 승자는 결국 타짜와 모텔 주인이란 말이 있다. 첫 끗발이 좋을수록 초심자의 행운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다가 끝내 개털이 되는 건 비단 도박판만의 익숙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이런 내기 고스톱이 선수와 하우스 제공자가 은밀히 대동단결해 짜고 치는 것이라면?
윤태호 작가가 펜을 꺾은 미 완결 웹툰의 화룡점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위기의 이병헌에게 내려온 천군만마 동아줄이 될지, 또는 올해 풍년을 맞은 쇼박스가 ‘암살’ ‘사도’에 이어 최단기간 해트트릭을 기록할지까지. ‘내부자들’ 만큼 작품 안팎으로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와 말풍선이 쉬지 않고 달리는 영화는 흔치 않다.
결론적으로 ‘내부자들’은 특A급까진 아니지만 어느 항목 하나 미달 점수 없는 범작 이상으로 빚어졌다. ‘이끼’ ‘미생’에 이어 대한민국 부조리에 또 한 번 횃불을 밝힌 윤태호의 열혈 팬들에겐 감독의 상상력과 결말에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이병헌에 대한 정서적 반감 역시 잔불이 남아있지만 영화는 이런 의문에 장시간 다듬어진 확신과 소신으로 답을 대신한다.
이 영화가 지능적인 건 어설프게 폼 잡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는 대중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역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대중들의 확증편향에 1차 주파수를 맞췄다는 건 적어도 교환 가치 이상을 해내겠다는 제작진의 자기 검열이 선행됐다는 의미다. 영화 흥행은 결국 ‘얼마나 새로운 그림과 매력적인 이야기로 관객을 기선 제압할 것이냐’일 텐데 ‘내부자들’은 이 점에서 기대 이상의 흡족함을 담아낸다.
원안자 윤태호가 비범한 창작자인 건 뜨겁고 예민한 이야기를 절대 먼저 흥분하지 않고 세련되게 그려낸다는 점이다. ‘내부자들’ 역시 ‘변하지 않으려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기득권자들의 섬뜩함을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이를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묘사해 메시지를 증폭시킨다. 이 웹툰의 튜닝에 뛰어든 우민호 감독 역시 부패 커넥션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범죄 액션물로 컨버팅하며 캐릭터의 볼륨을 키우는데 집중한다.
원작의 사진 기자를 진급 물먹는 경찰 출신 검사로 대체하며 세 인물의 꼭짓점을 형성,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은 원작을 풍성하게 하는 동시에 밀도까지 높여주는 서사 구조를 낳았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처단하고, 똘똘 뭉친 악이 선을 이겨선 안 된다는 이 영화의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선 적절한 갈등과 개연성, 인과 관계가 필요했는데 이를 위해 비주얼 보다 설계도 작성에 정성을 쏟은 느낌이다.
‘협녀’에 이어 다시 한 번 여론 심판대에 오르게 된 이병헌은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다가 용도 폐기돼 하수구로 추락하는 정치 깡패 상구다. 센 놈들에 붙어 돈과 힘을 얻지만 섣부른 욕망 탓에 주인을 물었다가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는 점에서 ‘달콤한 인생’이 연상되나 연기의 진폭은 그때보다 훨씬 확장됐다. 고개를 5도 틀거나 눈동자를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심도 깊은 감정 상태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재벌 오너의 채홍사 노릇부터 각목을 들고 기득권자들의 눈엣가시를 제거해주는 ‘충견’ 상구가 그들에게 손목이 잘린 채 나이트클럽 화장실 담당 웨이터로 신분 개악된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 처연하다. 정체를 감춘 채 복수의 칼을 가는 후미진 그곳에서 다른 목적을 갖고 접근한 우장훈(조승우) 검사와 맞닥뜨리는 장면 역시 스파크가 튄다. 이 신은 두 남자의 복수와 정의가 합선되며 영화가 고압 전류로 바뀌는 지점이기도 하다.
‘타짜’ 이후 화끈한 한 방이 없던 조승우도 9년만의 영화로 모처럼 도약을 맞을 것 같다. 그가 맡은 우 검사는 대선 후보 비자금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가진 상구를 통해 출세하려는 인물로 극중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해결사 이병헌을 돕는 조력자이지만 투톱으로 불려도 손색없는 묵직한 중량감을 보여줬다. 두 마초 배우의 투샷이 뿜어내는 긴장감과 서늘함은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에 이어 간만에 배우 보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데뷔작 ‘파괴된 사나이’ ‘간첩’을 연출해 김명민 전문 감독으로 불린 우민호의 세 번째 영화다. 애초엔 원작자가 영화화를 원치 않아 판권료를 세게 불렀지만 끈질긴 협상 끝에 빛을 보게 됐다. 130분. 19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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