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룡이 불이라면 배수지는 물이었다. '도리화가'는 물과 불의 이미지를 여러 번 사용하며 남성의 영역에 도전한 여성의 쉽지 않은 여정을 감성적으로 그려낸다.
18일 오후 서울 성동구 행당동 왕십리 CGV에서 첫 공개된 '도리화가'(이종필 감독)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성에게 금기된 시대, 판소리를 넘보는 소녀의 열정, 그리고 그런 그를 묵묵히 이끌어 가는 소리꾼 스승.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이 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서글프기도 유쾌하기도 한 판소리 자락과 어울려 깊은 여운을 줬다.
'도리화가'는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 진채선과 그의 선생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의 수장 신재효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류승룡이 극 중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 진채선(배수지 분)의 스승,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의 수장 신재효 역을, 배수지가 금기를 넘어선 조선 최초 여류 소리꾼 진채선을 역을 맡았다.
영화는 눈길을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으로 시작해, '심청가' 판소리 자락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녀에게로 이어진다. 소녀 채선은 아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기방에 맡겨졌고, 우연히 신재효의 '심청가'를 듣고 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이후 소리꾼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신재효가 이끄는 판소리 학당 동리정사를 몰래 찾아가 귀동냥으로 소리를 배운다. 신재효에게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애원을 해보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소리에도 법도가 있다(계집은 소리꾼이 될 수 없다)"는 말 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만큼, 첫 여류 소리꾼의 운명에 '대장금' 같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황홀한 기적은 없다. 그럼에도 소리를 향한 채선의 뜨거운 열정, 그런 제자에게 애정을 쏟아붙는 스승 신재효의 집념은 두 배우의 절제된 연기를 통해 표현돼 감동을 준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국민 첫사랑'으로 사랑을 받았던 배수지의 두 번째 작품이다. 두 번째 영화에서 연기 뿐 아니라 판소리까지 마스터해야 해 부담이 컸을 법도 한데, 결과물이 기대 이상이다. 배수지는 아직 피어나기 전, 향기를 품은 꽃봉오리처럼 싱그러운 채선이 시련을 거치며 만개한 꽃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러운 연기로 그려낸다. 또 '심청가', '춘향가' 등 영화 속 중요하게 사용되는 판소리를 직접 소화했는데, 듣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는 실력이 놀랍다.
류승룡은 공기처럼 가볍고 맑은 수지와 같은 선상에서 무게를 잡아주며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진채선은 신재효에게 풋풋한 연정을 표현하는 반면, 이를 받아주는 신재효는 제자나 딸을 향한 사랑인 듯 혹은 그렇지 않은 듯 절제된 연기로 분위기를 주도한다. 신분제로 출세의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입신양명'을 꿈꾸는 신재효가 택한 것은 "백성들만이 할 수 있는" 판소리였고, 마른 하늘에 소리를 쏟아내는 그의 모습은 묵직하게 끓어오른 불의 형상 같았다.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종필 감독은 영화 속 물의 이미지가 사용된 것에 대해 "남자의 소리는 불이라고 봤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 채선(배수지 분)이 아궁이의 불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 반대로 여자의 소리는 물이라고 봤다"며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서 (채선이)물에 빠지기도 하고 대사 중에 새벽 이슬이 돼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예쁘다는 장면이 있다"고 물과 불의 이미지를 활용한 사실에 대해 알리기도 했다.
한편 '도리화가'는 오는 25일 개봉한다. /eujenej@osen.co.kr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