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잘 나가는’ 인기 드라마 속 악역은 주인공을 괴롭히고, 잘 되어가던 일에 재를 뿌리는 등의 행동으로 시청자들의 주먹을 부르며 욕받이가 되곤 한다. 이에 미움을 받는 건 당연한 일. 특이 주부 시청자들이 많이 보는 일일극이나 주말극의 악역을 맡은 연기자들은 일상 생활에서 욕을 먹거나 등짝을 얻어맞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데 최근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 두 드라마 속 악역은 주인공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하며, 생각지 못한 재미를 안기고 있다.
박혁권은 현재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현 삼한 제일검이자 고려의 권력을 틀어쥔 도당 3인방 중 하나인 길태미를 연기하고 있다. 이인겸(최종원 분)의 오랜 심복으로 출중한 무술 실력을 가진 고수로,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장신구를 좋아한다. 촐랑대는 성격이지만 누구보다 잔혹한 면모를 감추고 있다.
길태미의 특징은 진한 눈 화장과 여성스러운 말투다. 고려 말 귀족들이 눈 화장을 진하게 했다고 알려져 있는 가운데, 길태미의 선이 살아 있는 아이라인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일으켰다. 짙은 눈 화장과 덥수룩한 수염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박혁권의 우아한 말투가 더해지자 독보적인 캐릭터로 구축이 됐다. 이 때문에 박혁권은 촬영 때마다 1시간 반~2시간에 걸쳐 분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앞서 설명한대로 길태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지만 가끔씩 보여주는 날 선 눈빛이 섬뜩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의 아들 길유(박성훈 분)가 포악한 성격을 드러내며 유생들을 괴롭혔던 것도 길태미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태미를 미워하는 시청자들은 거의 없다. 오히려 길태미가 나와야 재미가 있다며 그의 분량을 늘려달라고 청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길태미가 시청자들에게 무한 사랑을 받고 있는 캐릭터라는 뜻일 테다.
길태미는 악역이기는 하지만, 미워하기 미안할 정도로 학식이 부족해 빈틈이 많다. 중용과 논어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해 전혀 다른 내용을 외치면서도, 스스로에게 감탄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은 극을 더욱 유쾌하고 재미있게 만들곤 한다. 또한 감정 표현이 많아서 쉽게 속내를 알 수 있다는 점 역시 이 캐릭터의 매력 포인트로 손꼽힌다. 그러면서도 무술 실력만큼은 제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출중해서 카리스마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박혁권은 이런 길태미를 탄탄한 연기력으로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이제는 박혁권이 아닌 길태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게다가 박혁권은 극 초반 길태미의 쌍둥이 형인 길선미까지 연기해내며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뽐냈다. 어떤 캐릭터도 맞춤옷을 입듯 완벽하게 자기화시키는 박혁권에 시청자들의 찬사가 쏟아졌고,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MBC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에 출연중인 손창민 역시 박혁권과 마찬가지로 극악무도한 악역임에도 시청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어 눈길을 끈다. 손창민이 연기하는 강만후는 재산을 불리고 명예를 높이기 위해서는 사람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인물이다. 야망으로 인해 사랑하는 여자 신득예(전인화 분)의 아버지 신지상(이정길 분)을 낭떠러지로 밀었던 악마 같은 사람이다.
극 초반 강만후는 오민호(박상원 분)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득예를 속여 자신의 아내로 만들었다. 신지상을 죽인 뒤에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전처 최마리(김희정 분)와 밀월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았다. 부와 명예를 쌓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목숨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신득예에게는 이 세상 둘도 없는 순정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 사랑이 집착으로 인해 심하게 삐뚤어지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재미를 선사하고 있는 중이다. 강만후는 신득예가 오민호를 만나는 모습을 보고는 분노해 벼랑 끝에서 살벌한 협박을 해댄 바 있다. 하지만 곧 신득예를 안으며 사랑을 고백, 소름 돋는 섬뜩함을 내비쳤다. 그런데 강만후의 ‘신득예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강만후의 어딘가 빈 듯한 허당 매력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신득예를 질투하는 최마리를 구박하는 모습은 마치 시트콤을 보는 듯 하고, 매번 그렇게 당하면서도 여전히 신득예게에 쩔쩔 매는 모습은 그의 지극한 순정까지 느끼게 한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오혜상(박세영 분), 주세훈(도상우 분)에게도 굴욕 아닌 굴욕을 당해 깨알 같은 웃음을 주고 있다. 분명 손창민은 눈에 분노를 담고 악을 내지르고 있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청자들은 그가 악역이라는 것도 잊은 채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parkj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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