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1988’(이하 ‘응팔’)의 쌍문동 골목 다섯 가족 이야기에는 “맞아, 저 때 그랬었지”라며 무릎을 탁 칠 수 있게 하는 향수와 공감이 담겨 있다. 식탁에 올라온 반찬들을 이웃들과 나눠먹고, 입 밖으로 고민을 꺼내 놓지 않아도 먼저 알고 손을 내밀 줄 안다. 또 옆집 숟가락 수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동네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조금은 촌스럽고 오지랖 넓어 보이기도 한 88년 이야기에 우리가 열광하는 건 그만큼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뭔가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다. 어째 등장하는 인물들이 하나 같이 옆집에서 쉽게 보기 힘든 유형이다. 서울대를 다니고 있는 성보라(류혜영 분)부터 천재 바둑기사 최택(박보검 분), 공부 빼고는 뭐든 잘하는 최강 덕후 김정봉(안재홍 분)까지, 쌍문동 골목의 터가 좋긴 좋은가 보다.
성동일(성동일 분)과 이일화(이일화 분)의 첫째 딸인 성보라는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쌍문동 골목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고 소문이 난 보라는 집안의 자랑이자 동네의 자랑이기도 하다. 그런데 까칠하고 물불 가리지 않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동일과 일화조차도 보라를 편하게 대하지 못한다. 동생 덕선(혜리 분)과는 항상 머리채까지 잡으며 싸우기 일쑤. 그럼에도 맏이다운 의젓함과 불의는 참지 못하는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여장부’ 스타일이다.
지난 6회 방송에서 보라를 짝사랑한다고 밝힌 선우(고경표 분)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자, 쌍문고등학교 전교회장이다. 깔끔한 성격 탓에 방이며 독서실이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데, 이를 본 정환(류준열 분)이 경악할 정도. 엄마의 고약한 음식도 말 없이 먹어주는 착한 아들이고, 다정다감한 친구다. 이 때문에 쌍문동 골목 모든 엄마들의 워너비 아들로 통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장난기도 많다. 당시 유행했던 이종원의 의자 CF를 따라 하다가 다리 깁스를 하기도 하고, 수학여행에서 정환, 동룡(이동휘 분)과 함께 소방차 춤을 완벽하게 구사해 큰 환호를 얻기도 했다. 현재는 덕선의 무한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니, 다 가진 남자가 아닐 수 없다.
반전의 인물은 정환이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성격, 투박한 말투, 덕선과 투닥거리는 모습만 봐서는 축구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의외로 학교 성적이 좋다. 집중력과 승부욕이 남다르기 때문이라는데, 언제 공부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멀쩡한 허우대에 운동도, 공부도 잘하니 인기도 많을 것 같지만 성격 때문인지 그의 옆에 있는 여자라고는 덕선이 전부. 현재 정환은 덕선을 짝사랑하고 있는 중인데, 이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덕선을 지켜주는 모습으로 여성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공부 못해도 세상 만사가 행복하고 좋은 이들도 있다. 바로 춤으로 학교를 평정한 쌍문동 박남정 동룡과 대입학력고사 6수생 정봉이 그 주인공이다. 먼저 동룡은 아버지가 쌍문고등학교의 학주지만 영어 단어 하나 제대로 못 외우는 무식함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그는 한 번 본 춤은 그대로 따라 추는 타고난 춤꾼이자, 4명의 형들을 통해 보고 배운 인생 지식이 풍부해 쌍문동 해결사로 불리고 있다. 친구들이 고민이 생길 때면 제일 먼저 찾는 이가 동룡이인 것. 심오한 문제들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바둑의 신’이 아닌 ‘그냥 병신’인 택이를 옆에서 보살펴 주기도 한다.
정봉 역시 동룡과 마찬가지로 공부머리가 없다.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아 늘 뭔가를 하고 있긴 한데, 그것이 실 생활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아 엄마 라미란(라미란 분)의 골치거리가 되곤 한다. 하지만 정봉의 이 철없는 취미 생활 덕분에 복권에 당첨돼 성균네는 하루 아침에 졸부가 되기도 했다. 사회성은 떨어지지만, 좋아하는 것에는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며 엄청난 존재감을 발산하는 정봉. 이에 시청자들은 그의 미래에 대해 큰 궁금증을 드러내고 있다.
금은방 봉황당 집 외동아들인 택은 바둑계의 돌부처로 불리는 대한민국 국보급 바둑기사다. 11살에 프로에 입단, 13살에 세계최연소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88년 현재까지 바둑 랭킹 1위, 상금 1위의 자리를 지키며 최고의 바둑천재로 불린다.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타고난 천재성과 무서운 집중력, 가혹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피나는 노력 등이 지금의 택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바둑 외에는 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목소리 듣기 힘들 만큼 말수가 적고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 라면 하나 못 끓이는 건 기본이고 셔츠의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해 동룡의 보살핌을 받기도 한다. 친구들은 이런 택이를 그냥 ‘등신’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슴 같은 눈망울로 방긋 웃어주는 택이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할까 싶다. /parkj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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