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설산에 검붉은 피가 흩날린다. 상처입은 아비들의 헐떡임 뒤로 어둠이 깔리고, 고독은 깊어진다. 피 냄새 진동하는 지리산에서 마주한 두 수컷의 눈에는 처연한 슬픔이 담겨있다.
지난 9일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베일을 벗은 영화 '대호'는 괴수영화보다는 누아르에 가까운 색채를 지닌 작품이다. 동물과의 교감을 그렸다는 점에서 '판타지'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소중한 것을 잃은 수컷들의 진한 감정 교류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음을 울리는 웅장한 음악과 매순간 비장감이 넘치는 장면들이 더욱 그렇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으려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과 '산군'이라 불리는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 대호, 그리고 이를 잡으려는 조선포수대와 일본군의 이야기를 그린다.
최민식이 극 중 젊은 시절 조선 최고의 명포수로 이름을 떨친 늙은 사냥꾼 천만덕 역을, 정만식이 극 중 일본 고관 마에조노의 명으로 대호 사냥에 앞장 선 조선포수대의 리더인 도포수 구경 역, 김상호가 과거 만덕, 구경과 함게 포수 생활을 했던 조선 포수대의 일원 칠구 역을 맡았다.
최민식이 맡은 천만덕이 은퇴한 포수라면, 정만식과 김상호가 맡은 도포수 구경과 칠구는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현직 포수이다. 이들은 사냥에 나서지 않으려는 천만덕에게 대호의 사냥을 도와달라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하며 갈등을 만든다. 더불어 일본 유명 배우 오스기 렌이 지리산 호랑이를 탐하는 일본군 고관 마에조노 역을 맡아 강력한 삼각구도의 한 축을 이뤘다. 그리고 이들의 중심에는 CG로 완성된 대호가 있다.
영화의 공개 전에는 CG에 대한 우려가 많았지만, 막상 베일 벗은 영화 속에서 CG 호랑이는 생각보다 자연스럽다. 또 카메라의 시선 처리나 워크, 음향 등이 호랑이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주며 극에 긴장감을 높여준다.
역시나 최민식은 묵직한 존재감으로 영화의 무게중심을 잡아준다. 천만덕은 자연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인물. 최민식은 처참한 상황 속에서 이를 지키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만덕의 캐릭터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낸다. "최민식이 답이었다"는 박훈정 감독의 말이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이유다.
인상적인 부분은 지리산의 천군, 대호를 그리는 '대호'의 시선이다. 영화 속 대호는 이해할 수 없는 포악한 괴수가 아닌, 감정과 생각을 지닌 영물로 그려진다. 새끼를 잃은 그의 상황은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 만덕의 상황과 겹친다. 때문에 만덕과 대호가 주고 받는 감정들은. 생각보다 끈끈하고 진하다. 그렇다고 두 주인공의 교류가 동화처럼 따뜻한 것은 아니다. 장중하고 묵직하다. 결국에는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적이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두 존재의 사투. '대호'에서 어딘지 누아르의 향기가 난다면 이 때문이다. /eujenej@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