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인간에 대한 예의와 나눗셈을 말하는 휴먼 눈물주의보 걸작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5.12.14 07: 52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이미 행복할 이유가 충분함에도 습관적으로 결핍과 심리적 허기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열등감과 불행을 토로하는 결정적 이유는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나보다 잘 나고 똑똑하며 돈 많은 이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에 이런 비교 크레바스에 갇히는 순간, 죽는 날까지 ‘조금만 더’를 외치며 자학하게 될 뿐이다.
삶의 우선순위를 내가 먼저 정해놓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내 삶의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는 건 해발 8000m 고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폰서 없이 돈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아무런 대가가 따르지 않는 목숨 건 등반에 휴먼 원정대가 나선 이유는 세 가지. 동료의 죽음이 얼마든지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공감과 절대 헛되게 해선 안 된다는 인간에 대한 예의,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 한 산악인들의 남다른 자존감 때문이다.
엄홍길(황정민)에 이어 한국 산악계의 차세대 주자로 떠오른 박무택(정우 분)은 2004년 모교 산악부 대장 자격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지만 하산하며 8750m 데스존에서 기상 악화를 만나 실종된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후배의 사고 소식을 접한 엄 대장은 낙담한 채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 휴먼원정대를 꾸려 네팔로 향한다. 산악인으로서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을 이끌고 무혁과 실종된 후배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다.

‘히말라야’가 작정하고 관객의 누선을 자극하는 장면도 원정 대원들이 무택의 시신을 극적으로 발견하고 오열할 때다. 엄 대장이 “이 자식아, 너 여기 왜 이렇게 누워있어? 그 동안 얼마나 추웠어?”라며 얼음 미라가 된 후배를 원망하고 자책하는 모습에선 웬만한 강심장도 눈물을 참아내기 어렵다. 무혁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미필적 고의에 시달리던 대원 철구(이해영 분)의 눈물과 회한도 이 신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완성해준다.
실화이자 여러 번 다큐로도 다뤄진 해묵은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가장 우려된 건 과연 예상된 감동의 크기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여부였다. 안타깝게도 고인의 시신을 성공적으로 송환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댄싱 퀸’에 이어 랑데부한 이석훈 감독과 황정민 콤비는 자신들의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만큼 시나리오의 공백을 디테일한 연출과 연기력으로 채워 넣었다.
특히 황정민은 촬영 전부터 고인에 대한 스토리에 집중하며 엄 대장이 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정화해나갔고 백두대간 전지훈련에도 가장 앞장섰다. 좋은 배우는 배역에 잘 동화되는 것만큼 잘 빠져나와야 하는 법인데 ‘너는 내 운명’에 이어 간만에 자신의 캐릭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 했을 만큼 묵직한 몰입을 보여줬다. 이런 진정성은 스크린에서 트릭이나 얄팍한 기교, 기계적인 연기로 비쳐지지 않으며 관객을 서서히 히말라야로 빠져들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많은 장면에서 ‘음, 역시 황정민’을 수차례 되뇌게 하지만 특히 영하 40도 혹한 속 텐트에서 대원들에게 무전기로 대장으로서의 자책과 무력감을 고백할 땐 다른 대체 배우를 떠올리기 힘들었다. 혹시 술을 원 없이 마시려고 배우가 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애주가인 그가 선술집에서 단골 건배사 ‘나마스떼’를 외치며 막걸리를 들이킬 땐 침이 고일 정도로 실감났다.
같은 슬픔이라도 1~10단계로 잘게 나눠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꺼내 쓰는 건 웬만한 프로들도 쉽지 않은 영역일 텐데 황정민은 이 방면에서 이미 자기 확신 경지에 들어선 느낌이다. ‘사생결단’(06)에서 황정민과 호흡을 맞춰본 정우도 순수한 산 사나이 무택을 무난하게 표현했지만 황정민과의 투샷에선 어쩔 수 없이 디테일과 에너지가 다소 밀리는 모습이었다. 선배에게 한 수 배우겠다는 겸손은 좋지만 이렇게 밀릴 것까진 없었다. 힘을 줘야 할 장면에서도 임팩트 없이 평면적인 연기에 그쳤다는 인상이다.
따뜻한 유머에 일가견이 있는 이석훈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다. 한양대 출신인 그는 엄정화를 부활시키며 405만 관객을 동원한 ‘댄싱 퀸’(12)에 이어 작년 여름 다크호스가 된 ‘해적’(866만)을 연출하며 ‘군도’를 주눅 들게 한 이변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선하고 곱상한 외모와 달리 현장에서 원하는 컷이 나올 때까지 배우와 스태프를 괴롭히는 묵언수행 스타일 표리부동(?) 연출가란 소리도 듣는다. 12세 관람가이며 125분. 16일 개봉해 최민식 주연 ‘대호’와 맞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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