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영화 ‘대호’(사나이픽처스 제작)의 반응이 한결같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속도감과 관련이 있다. 연출과 연기는 비교적 흠잡을 데 없는데 드라마 전개가 다소 느린 것 아니냐는 불만과 아쉬움이다. 요즘 웬만한 액션 장르의 장편 컷 수가 3000컷 안팎인데 비해 ‘대호’는 이를 밑돌다 보니 어딘가 느슨해 보이고 헐거운 느낌마저 받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는 물론 착시가 아니다. 확실히 ‘대호’는 요즘 트렌디한 상업 영화보다 한 템포 느린 호흡으로 만들어졌다. 화난 지리산 호랑이가 자신을 노리는 일본군과 사냥꾼들을 사납게 해치우는 장면을 제외하면 이 영화를 지배하는 속도는 ‘안단테’에 가깝다. 그렇다면 속도에 가중치를 두지 않은 영화는 죄다 수면제 영화가 될 운명인 걸까.
‘대호’는 컷 수 늘리기 보다 인물들의 상호 감정과 심리 변화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조선 최고의 포수 천만덕(최민식)이 왜 천직처럼 여기던 사냥을 잠정 휴업하고, 그런 그가 다시 총을 잡기까지 어떤 우여곡절이 벌어지며, 그 결심의 종착지는 무엇이 돼야 하는지에 감독은 정성을 쏟는다. 이 짐을 짊어진 배우가 최민식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KTX와 달리 완행기차를 타면 창밖 풍경을 고스란히 포착할 수 있듯이 ‘대호’는 모처럼 배우 보는 맛, 영화 자체를 감상하게 해주는 예술적 가치를 담고 있다. 언제부턴가 영화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금융 상품처럼 변질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을 위로하고 적셔주는 좋은 영화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갖고 있다. 마치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하는 것처럼.
이 영화가 돈 벌기 위해 혈안이 된 천박한 영화가 아닌 건 바로 안타고니스를 활용하는 남다른 태도에서도 감지된다. 1920년 일제 강점기가 시대적 배경인데 각본을 쓴 박훈정은 일본 제국주의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동시에 이에 부화뇌동하는 조선 포수들과 (신경질적이지만) 패배를 인정하는 일본을 다각도로 묘사하는데 잉크를 아끼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지점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게 되며, 얼마든지 탐욕스런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존재론적 한계를 보여주는 설정이다.
‘대호’가 예술과 상업 영화 사이에서 기우뚱거리지 않은 또 하나의 족적은 만덕과 그가 떠받드는 산군님 간의 절묘한 스며듦에 있다. 만덕은 대호를 때려잡자는 동료들의 회유와 일본군의 협박에 저항하다가 어느 순간 총을 잡는다. 대호를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야 하는 이유가 선명해진 것이다. 아이러니 한 건 산군님과 만덕의 상황이 점점 닮아가고 어느 지점부턴 어떤 선택을 내리기 곤란한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12세 관람가를 위해 ‘대호’는 필요 이상 잔인하지 않고, 익숙한 부성애 코드와 선조들로부터 내려와 우리 몸속에 박힌 항일, 극일 DNA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쉽사리 반일 영화로 치부할 수 없는 건 그 보다 몇 곱절 큰 만덕의 감정 소용돌이가 관객을 집어삼킬 기세로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다.
‘명량’에 이어 최민식은 이 작품에서 또 한 번 자신의 삶의 터전을 불 질러 소멸시킨다. 자질구레한 애착에서 과감히 벗어날 때 비로소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걸 버리고 비웠을 때 비로소 우리는 뭔가를 얻게 된다. 이 영화의 기막히고 처연한 엔딩은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였고,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람료가 아깝지 않을 것 같다. 139분. 16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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