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씨’를 만난 건 운명이라고 했다. 선배 최민식의 콜을 받고 시나리오도 읽지 않고 하겠다고 나선 배우 정만식. 평소 화려한 언변에 장난기도 넘치는 그이지만, 야망에 불탄 악역을 만나면서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고독함을 끌어올렸다.
정만식이 출연한 영화 ‘대호’(감독 박훈정)는 일제강점기,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으려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과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둘러싼 이야기. ‘신세계’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의 신작이었고, 함께 했던 최민식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면서 개봉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믿고 보는 배우의 영향력은 비단 관객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싶다. 정만식은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된 계기를 전적으로 최민식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선배님이 콜 해주셨고 사실상 통보였다”며 웃음 지었다. 농담일 것 같았지만 진지한 말투로 인해 진담처럼 들렸다. 정만식은 당시 상황에 대해 “민식이 형이 제 이름을 불렀다는 말에 하겠다고 했다. 시나리오도 보지 않았던 상황이지만”이라고 전했다.
그렇게 정만식은 김대호 씨를 만났다.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구경은 일본 고관 마에조노(오스기 렌 분)의 명으로 대호 사냥에 앞장선 조선 포수대의 리더. 과거 대호에게 당한 깊은 원한과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누구보다 지독하게 대호 사냥에 앞장선다. 흉터 가득한 얼굴만큼이나 거친 인물로 극의 긴장감을 유발한다.
이와 관련해 정만식은 “아무래도 최민식 선배는 내 얼굴이 산적같이 생겨서 콜하셨나 보다”고 농담하면서도 구경을 연기하기 위해 노력했던 열정을 내비쳤다. 그는 “원래 현장에서 가만히 잘 못 있는 편이다. 산만해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엄청난 아이었는데, 영화보고 연기할 때는 집중도가 좋았다”며 “그랬던 제가 이번에는 역할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대호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한 번 몰입하니 자연스럽게 멍하게 있게 되더라. 이 영화 이후로 굉장히 많이 차분해졌다. 주변사람들과 대화할 때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생각을 한 번 더 하고 말하게 됐다. 영화가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말해 웃음을 유발했다.
그와 단 몇 분만 이야기를 나눠보면 재치 넘치는 입담 속에서도 진중한 눈빛을 발견할 수 있다. 연기에 대한 말을 나눌 때 더욱 그렇다. 이번에는 동물과 함께 연기해야 했는데, 심지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감정을 끌어내야 했다. 김대호 씨를 맞이하기 위해 그는 마치 동물학과 학생처럼 리포트를 쓰는 자세로 공부했다고.
정만식은 작품을 만난 것을 가리켜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최민식을 믿고 ‘대호’에 승선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끝까지 “연극할 때는 무게 있는 걸 많이 했는데 오랜만에 강한 힘을 만났다. 고요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힘을 느끼게 해줘서 구경에게 감사하다. 거부하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besodam@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