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성웅의 최근 몇 년 사이 필모그래피를 훑어보자. 그가 맡았던 역할들을 천천히 뜯어보면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 든다. 껄렁하거나, 잔혹하거나, 아니면 그 둘 다거나. 영화 ‘신세계’의 이중구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중간중간 그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났던 순간도 적지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를 알지는 못한다. ‘신세계’ 이후로는 어딘가 모르게 ‘이중구스러운’ 박성웅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지난 9일 첫 방송된 SBS ‘리멤버-아들의 전쟁’(이하 리멤버)의 박동호(박성웅 분) 변호사를 처음 봤을 때도 이 같은 선입견은 계속됐다. 뒤로 바짝 붙여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 수틀릴 때마다 꿈틀거리는 눈썹, 등판을 가득 메운 용문신, 건장한 체격에 ‘날티 나는’ 미소까지. 이중구류의 프로 건달이 아니면 사기꾼이리라 믿었다. 드라마가 종영할 때까지 정을 붙일 가능성이라곤 결단코 없는.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간만에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멀쩡한 허우대가 극강의 수트핏을 보여줘서도, 질식할 만큼 진한 마초 냄새를 풍겨서도 아니다. 아무리 센 척을 하고 위악을 떨어도 이내 그의 연약함을 찾을 수 있어서다.
승률 100%를 자랑하는 최고의 변호사는 박동호는 재벌 2세 남규만(남궁민 분)이 저지른 살인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돼 누명을 쓴 서진우(유승호 분)의 아버지 서재혁(전광렬 분)을 돕기로 했다. 물론 초반에는 수임료 타령을 하며 서진우의 가련한 호소를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더러운 판을 뒤집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돈과 권력을 법으로 뒤집어 사람을 지켜내보고 싶었다. 그래서 박동호는 서재혁의 변호인으로 나섰다.
그가 이미 굳어진 판을 엎어보고자 했던 마음은 부패한 세상을 견딜 수 없는 연약함과도 같다. 그러나 이 여기에 행동력이 덧입혀질 때는 그저 연약함에 그치지 않는 힘이 발생한다. 박동호는 이 힘으로 남규만을 끝의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는 승리를 손에 넣을 뻔했다. 그러나 온 힘을 다 해도 판은 뒤집히지 않았다. 박동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의를, 서진우를 놓는다.
능력도, 외모도 평범치 않은 인물이지만 박동호에게 손쉽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이유는 무언가를 바꿔보고자 했던 연약한 발버둥, 그리고 이어 그가 겪은 현실적 좌절 때문일 터다. 시청자들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만, 드라마 속의 그는 언젠가 이 고민을 해결할 것만 같은 신뢰가 든다. 서진우를 포기하고 남규만의 밑으로 들어간 박동호가 아직까지 날을 세우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기대감은 더욱 높아진다.
21세기는 개성시대임을 새삼 느끼게 하는 화려한 의상과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만은 100% 승률을 자랑하는 비현실적 능력치도 캐릭터에 매력을 더했다. 드디어 이중구를 깨고 박동호로 거듭난 박성웅의 변신이 반갑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SBS ‘리멤버’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