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대호'(박훈정 감독)에서 정석원은 일본군 류 역을 맡았다. 유독 군인 역할을 많이 맡는 그지만, 이번 역할은 관객들로 하여금 '백지영의 남편', '배우 정석원'이 아닌 일본 군인 류라는 존재에만 집중하게 했다. 특유의 늘씬한 키와 딱 벌어진 어깨, 구릿빛 피부 등은 군인이라는 역할을 하기에 꼭 맞는 천혜의 조건(?)이었고, 거기에 각이 잡힌 딱딱한 태도, 억눌린 듯 불안정한 표정 등 조선인 출신 일본군에 어울리는 적절한 연기까지 더해지니 극 중 대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최민식, 정만식 등 센 선배 배우들과의 장면에서도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대호'는 일제강점기, 더 이상 총을 들지 않으려는 조선 최고의 명포수 천만덕(최민식 분)과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에는 산군이라 불리는 지리산의 마지막 호랑이, 자연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명포수 만덕(최민식 분), 생존을 위해 호랑이를 잡는 구경(정만식 분), 칠구(김상호 분), 호랑이 가죽을 수집하는 일본의 고위군관 마에조노(오스기 렌 분) 등 각기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류는 마에조노의 눈에 들어 출세를 하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마에조노와 함께 계속해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정석원은 영화를 보고 난 소감에 대해 "고생한 건 생각도 안 났다"며 감동을 표했다. "너무 감정 이입이 잘 됐고, 아들과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부자 관계, 그 마지막의 최민식 선배님이 그 호랑이와 함께 할 때 그 때가 되게 짠했다"는 말에서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묻어났다.
이 영화에서 그를 가장 벅차게 했던 것은 최민식과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 배우"라고 선배를 치켜세우며 "함께 작업하는 것 자체가 너무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믿겨지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한없이 즐거웠고,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설렜다. 계속 설렜다. 지금도 그렇다"고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제 이름만 불러줘도 감사했죠. '석원아 밥 먹었냐? 반찬 뭐냐?' 그것 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요. 최민식 선배님은 스태프 하나하나의 이름을 다 알고, 다 불러주시고, 그렇게 친절할 수 없고, 아빠 같으실 수 없어요. 하나하나 다 챙기고, 함께 하는 걸 되게 좋아하세요.(웃음)"
정석원의 표현에는 가감이 없었다. 과장을 하지도 않았고, 대수롭지 않은 척, 멋잇는 척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롯이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겸손하고, 정직하게 표현했다. "어떻게 이 영화를 하게 됐느냐"는 말에는 "나는 선택권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 눈길을 끌었다.
"솔직히 고상한 척, 멋있는 척, 얘기를 하고 싶은데, 전 아직 뭔가를 선택할 수 없어요. 선택을 해주시면 그저 감사할 뿐이죠. 그리고 분명 이 작품을 통해서 많이 얻었고, 깨달았어요. 감사해요. 이건 정말 저의 행운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 역할을 위해서는, 조선인이지만 일본 군복을 입은 일본군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는 게 중요했다.
"그 때 시대적 배경으로는 '친일파'라는 말이 맞겠죠. 그 때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였고, 일본의 일을 돕지 않았으면 먹고 살기 힘든 시대였어요. 저로서는 직접 겪지 않아서 그런 것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공감대를 찾으려고 노력했어요.(류와) 비슷한 게 뭐가 있을까 하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류는 분명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만주로 가고 싶어하는 인물인데, 그러려면 호랑이를 잡아 마에조노에게 점수를 따야한다.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건 천만덕 밖에 없다, 이렇게 하면서 이해해 보려고 했죠."
류의 상관 역을 맡은 오스기 렌은 일본의 국민 배우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배우다. 정석원은 "언어로 소통이 안 돼도 통하는 게 있다"며 오스기 렌과 정서적 교류를 했던 경험에 대해 설명했다.
"언어로 소통이 잘 안 된다고 해도 주고 받는 느낌이 있어요. 촬영할 때 말고도, 음식이라던지 농담을 주고 받는다던지, 공감되는 부분들이 있었죠. 아들 사진도 보여주셨어요. 아들이 저랑 동갑이더라고요. 저는 우리 강아지들 사진을 보여 주기도 하고,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친해졌어요. 편해지고 그랬어요. 그런 게 참 신기했어요."
선배들에 대해 끝없이 존경을 표하는 모습이나,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려고 한다"는 말에서는 군인 같은 느낌이 많이 났다. 정석원은 어딘지 모르게 각이 잡혀 있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깍듯한 느낌이 많은 부분에 대해 "군인 정신이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중에 남고에 체대를 나와서 해병대, 액션스쿨을 다녔어요. 그리고 나서 일을 시작해 기본적인 베이스로 (군인 정신이) 깔려있어요. 예의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요. 그게 과한 편이죠. 그래서 많이 걷어냈어요.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얘기해주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진짜 군인이었어요. 가만히 앉아서 '안녕하십니까?' 인사하고, 숟가락 세팅 잘 하고, '식사 맛있게 드십시오'가 당연했어요. 그런데 점점 풀어졌어요. 다른 사람들이 불편한 거예요. 어느 순간, 불편해하는구나, 싶어서 바꾸게 됐어요."
'군인 정신'(?)은 결혼으로도 바뀌었다. 아내를 사랑하는 감정이 그를 더욱 부드러운 사람으로 만든 것. 그는 아내와의 관계를 통해 여성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던 '울렁증'을 극복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는 '멜로 영화'도 찍을 수 있을만큼 감정적으로 더 풍부해졌다는 얘기를 하며, 다양한 역할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멜로는 선택받는 자에요. 시켜만 주시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어요. 예전엔 여자들 앞에서 말도 못 꺼냈어요. 그 정도로 보수적이고, 딱딱하고 소통을 못했죠. 농담도 못 주고 받고. 결혼을 하면서 그런 감정과 느끼는 것들이 달라졌어요. 제 스스로 '너 이런 사람이었어?' 그런 게 발견돼요. 연애할 때부터 지금까지 총 6년인데 '이런 모습이 있었어'?', '저런 모습이 있었어?' 하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초반에 데뷔했었을 때 선배들이 많이 그런 말씀을 했었어요. '사랑을 해 봐라.' 이제 그런 말씀이 이해가 가요." /eujenej@osen.co.kr
[사진] 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