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 요즘 방장이야, 공부 안 한다고. 놀아.”
형의 안부를 묻는 친구들에게 정환(류준열 분)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장장 7수 끝에 성균관대 법학과에 합격한 정봉(안재홍 분)이 이번에는 PC통신에 빠진 것이다. 앞뒤가 볼록한 모니터의 검은 바탕 위로 생소한 글자들이 떠오르고 시끄러운 모뎀 소리가 울릴 때 괜히 그리운 기억들이 머리를 메운다. 모르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았던, 가끔은 세상 모르고 채팅을 하다가 전화비 폭탄을 맞기도 하던 그 때의 기억들.
지난 9일 방송된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에서 정봉과 미옥(이민지 분)의 극적인 해후를 도운 것도 PC통신이었다. 천리안 상퀴방(퀴즈로 배우는 상식방) 방장이 된 정봉은 연상퀴즈를 통해 어언 30년을 쌓아온 ‘덕후력’을 유감 없이 뽐낸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퀴즈를 내던 정봉은 문제의 난이도를 조금 올렸다. 그가 적은 단서는 ‘우주여행’. 채팅창에는 ‘아폴로13’ ‘스푸트니크’ ‘스타워즈’ 등 각종 오답이 난무했다. 그러나 회심의 미소를 짓는 정봉의 눈 앞에 뜬 ‘부루마블’. 정답이었다.
우주여행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연상할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정봉에게 우주여행이란, 1989년 미옥에게 고백하며 건넸던 부루마블의 황금열쇠 중 하나였다. 정봉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그 만능열쇠를 미옥에게 주고 싶었다. 이를 맞힌 것은 ID ‘매기의 추억’. 정봉도 대번에 미옥을 떠올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매기는 미옥의 고등학교 시절 별명이던 배우 장만옥의 영문명이다.
정봉은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만남퀴’를 입력했다.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그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종로’ ‘일요일 5시’까지 적었을 때 정봉은 채팅창을 확인하고 심장을 부여잡았다. ‘1층 아니라 2층’. 정봉과 미옥이 엇갈렸던 카페 반줄 이야기였다.
‘만날 사람은 반드시 만난다’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 ‘접속’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내용도 시기도 약간은 차이가 있지만 정서만은 유사했다. 특히 두 작품을 관통하는 PC통신이라는 소재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로 배경을 옮긴 뒤 이뤄진 ‘응팔’ 속 정봉과 미옥의 만남을 표현하기에 적합했다. 채팅방에서 처음 재회했을 때는 ‘Pale Blue Eyes’가, 반줄 2층에서 또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포옹 장면 위로는 ‘A Lover's Concerto’가 깔릴 것만 같았다.
5년 전 끝내 전화 한 통 못 한 채로 끝났던 사랑이 5년 후 전화선을 타고 다시 시작됐다.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고야 만 것이다. 정봉과 미옥의 ‘접속’이 남달리 기억에 남는 이유다. 남은 ‘응팔’ 2회 동안 두 사람이 다시 아파하는 일 없이 행복하길 바라 본다./bestsurplus@osen.co.kr
[사진] ‘응팔’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