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늦 봄, tvN 신원호 PD는 서울 상암동 CJ E&M 사옥 자기 자리에서 펑펑 울고 있었다. 자신의 첫 드라마 '응답하라 1997' 기획을 마치고 출연진 캐스팅에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시절이다.
여자 주인공 성시원 역에 정은지, 남자 주인공 윤윤제 역에 서인국. 이 둘을 받칠 조연으로 신소율과 은지원, 인피니트 호야 등의 이름이 캐스팅 보드에 적혀 있었다. KBS 2TV '해피선데이' PD 시절부터 인연이었던 은지원을 제외하고는 드라마 시청자를 상대로 인기 여부를 따지기 전에 인지도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신 PD, 아니 KBS 예능국 입사 이전부터 영화연출이 꿈이었던 신 감독은 캐스팅을 끝내고 어린 아이처럼 눈물 펑펑 흘리며 울었다고 했다.
"얘들 데리고 도대체 뭘 할수있지 막막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라고? 그건 '응답하라'가 잘되고 나서 얘기였다. 정은지와 서인국, 둘 다 오디션에서 만났는데 느낌은 좋았다. 주연 남녀가 아닌 다른 역할로 써볼까 생각을 했었다.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후로도 계속해서 부산, 대구, 경북, 경남 등 영남지방 출신들은 물론이고 그쪽에서 군대나 학교 생활한 배우들까지 다 뒤졌다. 심지어 아버지 직업 때문에 영남지방에서 몇 달 살았던 이들까지 다 조사해 연락했다. 당연히 다 까였다."
신 PD는 '1박2일'의 시청률 전설을 만들어낸 현 CJ E&M 이사, 당시 '해피선데이' CP인 이명한 PD의 신뢰를 받았던 후배였다.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으로 연출 데뷔를 했고, 부진의 늪에 빠졌던 이경규를 호스트로 내세워 주위의 우려와 달리 멋지게 성공시켰다. 특히 신원호의 아이디어로 출발한 '남격 합창단'은 박칼린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전국을 감동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그렇게 이명한 옆의 우 원호 좌 영석은 그 시절 KBS 주말예능으로 전국을 휩쓸었고 이후 차례로 tvN에 스카우트 됐다.
그는 '남자의 자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기자와 만났을 때 예능 PD가 푸대접 받는 방송국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자신의 꿈이 영화감독이기는 했지만, 막상 예능 PD를 해보니 예능 안에 드라마와 다큐,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다 들어있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지상파 TV의 캐시카우 역할을 맡았던 예능국의 방송국 내 위상은 초라했다. 이명한이 자신을 따르던 후배들과 함께 지위와 명성이 보장되는 KBS를 뒤로 하고 '모험의 땅' 케이블로 떠난 데는 이런 시대 상황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KBS였다면 예능국 신 PD가 드라마를 찍을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tvN에서는 가능했다. 대신에 제작비 지원이나 방송국의 후광은 KBS와 비할 바 아니었다. '응답하라 1997'을 준비하면서 신원호는 케이블의 한계와 서러움을 온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배우 캐스팅 때부터 말도 안되게 힘들었다. 밑천이 없으니까, 특 A급부터 밑으로 쭉 내려왔는데 연락한 배우들 모두에게 다 까였다. 배우뿐 아니라 아이돌들, 심지어 연기 한 번 안해본 멤버까지 모두 다 거절당했다. 까여도 너무 까였다. 인지도 낮은 케이블 드라마라서 누군가 (시청자) 관심을 끌어줄 스타 한 두명이 필요하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었다. 원래 캐스팅이란 노바디(무명)를 섬바디(스타)로 만들 때 PD나 작가에게 큰 보람을 준다는 걸 나라고 모를까. 하지만 그건 지상파있을 때, 장사로 치면 특급 백화점 1층 점포에 자리잡는 것처럼 비빌 언덕 있을 때 얘기다. (케이블에서는) 누군가 내가 여기서 장사하고 있다고 소리질러줄 A급 스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그게 안된거다. 전혀."
시름에 젖어있던 그에게 친한 동료 한 명이 에이핑크 정은지를 얘기했다. 걸그룹 에이핑크조차 뜨기 전이었고 그 멤버들 속 정은지는 가요프로 담당 PD들조차 생소하게 여겼던 때다.
"시원 역할을 찾느라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 에이핑크 은지를 추천했다. 나는 그때 에이핑크가 에잇(eight, 8)핑크인줄 알고 "멤버가 여덟명이냐?"고 물었다. 내가 아이돌 그룹들을 잘 모른 것도 사실이지만 드라마 주인공의 기대치로서는 인지도가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은지를)부르지말라고 했는데 벌써 연락했다는 거다. 어쩔수없이 봤는데 첫 말투부터 딱인거다. 딱 시원인거다. 속으로 "하필 왜 너냐, 너무 아깝다"고 또 펑펑 울었다. 걸그룹의 공산품마냥 규격화된 미모가 싫었는데 그점에서도 은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다. 서인국은 처음에 성재나 호야 역할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했고."
다 알다시피, 신 PD의 캐스팅 고생담은 여기까지다. '응칠'은 대한민국 드라마의 트렌드를 바꿨고 케이블 tvN은 지상파를 타고 넘는 수준으로 올라갔다. 정은지 캐스팅은 신의 한 수로 기록됐고 정은지는 보석같은 연기를 선보였다. 다음 시리즈 '응사'부터 신 PD는 밀려드는 캐스팅 민원 처리를 거절하고 뿌리치느라 고생했다. 여 주인공 고아라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5년 '응팔'. 속편은 전편보다 못하다는 통념을 통렬히 비웃듯이 세번째 시리즈는 더 큰 반향과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응팔'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신 PD 주변은 가수 오디션 원서접수 창구를 방불케 했다. 난다긴다하는 대한민국 기획사들의 매니저들이 저마다 특급 리스트를 손에 들고 신 PD 만나기를 기다렸다. 신 PD는 의외의 카드를 선택했다. 걸스데이 혜리. 여론은 신데렐라 탄생이라 부러워하면서 '발연기는 어쩔거냐'고 시샘했다. 혜리는 지금 반짝반짝 유리구두를 신고 있다. 정은지 때 울면서 캐스팅 했던 신원호는 혜리 캐스팅 때 속으로 웃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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