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불통남이다. 토라진 여자친구를 달래는 대사가 매번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가 다라니. 왜 화가 났는지를 일일이 짚어 줘도 “나 너랑 싸우고 싶지 않아”가 전부다. 공감 능력 떨어지는 애인의 단골 대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가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은 잘생긴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tvN ‘치즈인더트랩’(이하 치인트)의 유정(박해진 분)은 홍설(김고은 분)에게 처음 “사귀자”는 말을 꺼낼 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 사귀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가 끝이었다. 관심이 있다든가, 좋아한다는 둥 상투적인 표현조차 없었다.
얼떨결에 과 최고의 인기남 유정의 여자친구가 됐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유정을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홍설이었다. 홍설은 귀찮게 달라붙는 여자 후배의 옷에 실수인 척 술을 쏟고 몰래 미소짓던 유정의 모습에서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음을 느꼈다. 유정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도 적지 않았지만, 모두 유정에게 약점을 잡히는 과정에서 그 민낯을 발견한 이들이었다. 홍설은 온전히 예민한 감으로 유정의 날카로운 눈빛을 읽어냈던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유정에게 홍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홍설에게 사귀자고 말한 유정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철천지 원수 백인호(서강준 분)와 홍설이 붙어 있는 꼴도 보기 싫었고, 어떤 약점 없이도 자신의 숨겨진 이면을 발견한 홍설을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조종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그는 홍설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주변인들을 움직였다.
홍설의 주변인들이 한 일이니 홍설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홍설은 유정이 허 조교(이우동 분)를 사주해 자신에게 장학금을 받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허 조교가 과 전체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는 것도. 유정은 자신의 앞에서 또 한 번 자초지종을 묻는 홍설에게 “네가 휴학하는 게 싫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 모든 상황에 화가 난 홍설이 자신을 등지자 유정은 “솔직히 말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라고 감정 없이 되뇌인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 뒤의
그런 유정이 게임을 하면서 지난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사람들, 윽박만 지르는 사람들, 빈정대는 사람들, 귀찮게 다가오는 사람들. 유정은 이들 사이에서 가장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쓰게 됐다. 가장 손쉽게 주변인들을 조종할 수 있도록 하는, 사람 좋게 미소 짓는 가면을. 매번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하고, 종이 공예에 몰두했다.
유정은 회상 말미 홍설의 얼굴을 그렸다. “너도 그랬어. 날 알아채고, 비웃고, 멋대로 판단하고, 외면하고. 설아, 난 이상하지 않아.” 아무도 듣지 못했을 상처 입은 유정의 외마디 비명이었다. 그리고 이는 아무도 사랑한 적 없던 유정의 피맺힌 고백이기도 했다. 이 역대급 불통남에게서도 묘한 연민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치인트’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