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무려 6년 만이었다. ‘우아한 세계’ 이후 제작과 책 작업에 골몰하던 한재림 감독은 주피터필름의 연출 의뢰를 받았고, 송강호와 재회했다. 그는 잊혀져가던 자신을 알아봐준 제작사와 투자사 쇼박스에 반드시 흥행으로 보답하겠다며 칼을 갈았다.
그런데 크랭크 인을 앞두고 제작사 입장에서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제작사측은 감독이 스토리텔링과 연출력은 탁월한데 번번이 정해진 예산을 지키지 못 한다는 업계 뒷말이 많은 것으로 자체 판단했다. 이에 제작사는 조심스럽게 연출 고용 계약서에 쇼박스와 제작사간에 합의된 예산을 초과하지 않고 이를 어길시 모른 체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뒀다. 감독은 흔쾌히 사인했고 제작사는 결단에 따라준 감독에게 연출료 외에 흥행 인센티브로 제작사 지분 5%를 주기로 한다.
영화는 2013년 가을 9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대박을 기록했고 그렇게 모두 승자가 돼 축배를 든 줄로만 알았다. 문제는 당초 우려했던 예산 초과가 현실이 돼 정산서에 부메랑처럼 반영되면서부터다. 과거 같으면 투자사와 제작사가 서로 5대5 책임을 지겠지만, 대기업 배급사가 한국 영화 지형을 바꾸기 시작하며 예산 오버의 책임은 전적으로 제작사 부담이 돼버렸다.
주피터필름은 ‘관상’ 극장 부금으로만 세전 44억원을 벌었다. 하지만 이는 쇼박스에 제작사 지분 8.5%를 양도한 뒤 발생한 액수. 초과된 제작비 12억5000만원에 상응하는 제작사 몫을 쇼박스가 취해간 후 이뤄진 계산법이다. 돈은 벌었지만 주피터는 자존심이 상했고 잠이 안 왔다. 촬영 20% 시점부터 예산 오버의 경고음을 수차례 울렸고 신 다이어트로 예산을 지키자며 거듭 읍소했지만 뒷짐을 쥔 쇼박스가 야속했고 제작사의 뜻을 저버린 감독이 원망스러웠다.
‘명량’의 5분의 1 수준인 하루 평균 20컷 분량이 갈 길 바쁜 제작사 입장에선 안타까웠고 정성 들여 영화를 찍어내는 감독은 제작자가 연출에 대해 뭘 아느냐며 자주 부딪쳤다. 급기야 감독은 현장에 제작자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불쾌해했고 투자사는 제작자의 현장 방문 자제를 권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랐다.
흥행 수익을 나누는 정산 과정에서 이번엔 한재림 감독이 분루를 삼켜야 했다. 제작사가 주기로 약정한 흥행 보너스 1억8000만원의 지급을 미뤘기 때문이다. 900만 흥행 감독이 월급 떼인 스태프들이 찾아가는 영화산업노조 신문고를 두드리는 진풍경이 연출됐고, 이 과정에서 제작사가 감독에게 50%라도 주고 서로 원만하게 끝내는 게 어떻겠냐는 조정안이 나왔다. 감독은 내키진 않았지만 이거라도 받겠다고 했고 주피터는 발을 뺐다. 법원 판결을 받아보기로 한 것이다.
주피터필름이 처음부터 돈 욕심 있는 얄팍한 속셈이 있었더라면 아마 ‘관상’으로 번 돈 절반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는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재단 측은 거금을 일시불로 기부한 곳은 개인과 기업을 통틀어 주피터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 영화사는 세월호 때도 유니세프에 1억을 내놓았다.
주피터 측은 또 단순 변심으로 감독에게 보너스를 주기 싫어 꼼수 부린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려워 처음부터 1억8000만원을 영화산업노조에 기탁할 의사를 밝혔고, 법원 공탁금으로 지정해 별도 계정으로 관리해왔다. 처음부터 내 돈이 아니므로 탐내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주기로 한 돈, 그냥 당사자에게 지급해버리면 될 걸 왜 주피터는 쿨하지 못 하다는 말을 들어가며 복잡하게 일을 끌고 가는 걸까.
주피터는 예산 초과 책임을 왜 제작사 혼자 짊어져야 하고 언제까지 투자사와 감독에게 끌려가야 하는지 이번 기회에 묻고 싶은 거다. 단 만원이라도 좋으니 예산을 지키지 못한 감독도 뭔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룰과 판례를 만들고 싶은 게 이번 소송의 진짜 목표다.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영화제작가협회와 감독협회가 이들의 소송을 숨죽여 지켜보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두 집단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겠다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 상태다. 결과에 영향을 끼칠 제 식구 감싸기 식 논평을 삼가겠다는 성숙한 태도다.
혹자는 나무라듯 말한다. ‘세상에 어느 감독이 예산을 초과하고 싶어서 하나? 다 잘해보자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럴 듯 하지만 절반 이상은 틀린 말이다. 학예회가 아니고 수십억 투자받아서 영화 찍는 상업 감독의 1차 미덕은 바로 예산 준수에 있다. 투자사의 깐깐한 허들을 통과한 시나리오와 콘티는 그래서 현장에서 존중돼야 하고, 정해진 예산 내에서 창작하기로 합의해놓고 나중에 날씨 탓, 배우 스케줄 탓 하면 프로가 아닌 거다.
예산 초과한 감독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 이번 소송은 허무하게 원고가 패소할 수도 있고 향후 영화계에 레퍼런스가 될 만한 판결이 나올 수도 있어 주목된다. 주피터는 이번 기회에 기성 감독들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히게 됐지만, 적어도 영화 산업을 건강하게 하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려 한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제작사로 재평가 받게 될 것이다./bskim0129@gmail.com
<사진> 관상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