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다가왔고 운명처럼 선택했다. 하지만 선택 이후 청춘이 짊어진 부담은 어마어마했다. 영화 '동주'를 만난 배우 강하늘의 이야기다.
강하늘은 이준익 감독의 '동주' 출연 제안에 생각해볼 것도 없이 '동주' 출연을 결정했다. 평소 윤동주 시인의 시를 좋아하기도 했고 영화 자체의 매력도 컸던 덕분이었다. '평양성'을 통해 자신을 스크린에 데뷔시켜준 이준익 감독에 대한 믿음도 작용했다.
하지만 윤동주였다. 전 국민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었고 게다가 윤동주가 영상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윤동주 이름에 먹칠을 할 수도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돌아올 비난의 화살 역시 어마어마할 수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의 부담감이었지만, 그 부담감이 오히려 약이 됐다. '동주'를 본 이들이라면 강하늘이 연기해낸 윤동주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듯싶다. 흑백사진을 통해 봐왔던 윤동주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강하늘은 일제시대, 치열하게 고민하고 반성하던 청춘 윤동주의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강하늘은 어떤 마음으로 윤동주를 연기했을까. 언젠간 만날 윤동주 시인에게 욕만 먹지 말자는 심경이었단다. 자신이 주연을 맡았다는 생각보다도 윤동주 시인에게 폐만 끼치지 말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결의를 다졌단다. 그 마음이 와 닿았던 걸까. 스크린 속 강하늘은 윤동주 그 자체다.
"제가 책임감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이틀롤에 대한 마음이 별로 없어요. 현장은 즐기고 보자는 게 첫 번째이고 상대를 믿자는 게 두 번째이죠. 그런 걸 마음에 새기려고 노력했어요. 박정민과 감독님한테 의지했죠. 촬영 현장을 갈 때마다 결의에 차서 갔는데 나중에 제가 윤동주 선생님을 만났을 때 욕 듣지만 말자는 결의였어요. 언젠가는 만날 거잖아요(웃음). 윤동주 선생님을 영화화하는 첫 작품에서 욕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어요. 대단한 연기를 하겠다는 결의가 아니라 폐 끼치지 말자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다른 의미의 결의죠."
강하늘은 이번 작품을 위해 머리까지 밀었다. 남자들에게 삭발은 쉬운 일일 수도 있지만 작품을 해나가야 하는 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때문에 주위에서 강하늘의 삭발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강하늘은 이런 지인들의 태도에 약간 마음이 상했다. 작품을 위해서라면 삭발이 뭐가 대수인가. '동주' 속 강하늘의 삭발 장면은 이런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동주'에서 머리 자르는 장면에 심혈을 기울였던 기억이 나요. 삭발 장면 때문에 주변 분들한테 마음이 상했던 적이 있었어요. 윤동주 시인님을 연기하는데 머리 자르는 것 때문에 말리는 거예요. '동주'는 내 평생의 작품이 되는 건데 몇 달 앞만 보고 말리니까요. 감독님이랑 의기투합해서 밀어버렸죠(웃음). 그 장면이 내 실제 머리를 미는 거라 NG가 나면 안 되니까 많이 심혈을 기울였어요. 머리 미니까 시원하던데요. 하하."
극 중 윤동주는 평생의 벗이자 라이벌인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자극을 받는다. 그렇다면 윤동주를 연기한 강하늘에게 자극을 주는 인물은 누굴까. 자기 자신이란다. 자기 자신에게 자극을 받아야 자기 자신의 실수가 보이고 꾸짖을 수 있다고 했다. 절대 '나 자신이 나의 라이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그다.
"저한테 자극을 주는 건 저 자신이에요. 제가 하는 걸 보면서도 자극을 느끼죠. 제가 윤동주 선생님과 비슷한 접점이 뭐냐면 나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나를 사랑하니까 꾸짖을 수 있는 거고 3자 입장에서 보려고 하죠. 잘못하는 게 보이고 실수가 보이고. 그게 가장 큰 자극제인 것 같아요."
운명의 장난으로 '동주'와 강하늘의 또 다른 작품인 '좋아해줘'가 같은 날 개봉하게 됐다. 울상을 지을 수도 있는 상황에 강하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요"라며 웃어 보였다. 그때 그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두 편의 영화에 대한 강하늘의 예의였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했어요. 개봉 시기가 비슷해질 것 같다고 들리다가 한 주차가 될 수도 있겠다 하다가 갑자기 같은 날로 확정이 나버렸더라고요. 쉽지 않은 상황이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죠. 그 상황에 충실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지금이 '동주'라면 '동주'에, '좋아해줘'라면 '좋아해줘'에 충실해야죠. 이도 저도 아닌 위치에 서 있으면 둘 다 놓칠 것 같아요." / trio88@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