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영화 '바람'에서 시작됐다. 지난 2009년 늦가을, 이성한 감독 정우 주연의 영화 '바람' 언론 시사회가 서울 이화여대 아트하우스에서 열렸다. 대다수 상업영화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을 제작비 규모에 따라 1~5개관씩 빌려 언론 시사를 개최한다. 무명 감독에다 변변한 스타 출연자 한 명도 없었던 '바람'은 가족적인 분위기로 조촐하게 행사를 진행한 셈이다.
당시 시사회에 참석했던 기자는 두 번 깜짝 놀랐다. 영화가 생각 외로 너무 재미있어 푹 빠져들었고, 처음 보는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워낙 참석한 기자가 소수이다 보니 시사가 끝난 후 인근 중식당에서 열린 뒷풀이에 얼굴을 비칠수 있었다. 이성한 감독을 비롯해 정우와 지승현 등 젊은 배우들도 자리를 같이 했다. 정우와의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은 아직도 뚜렷하다. 연기자 데뷔후 오랫동안 인고의 시간을 보낸 늦깎이 주연이었지만 영화에 대한 열의와 애정으로 가득찼다. 눈빛은 순수했고 대화는 겸손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놀랐다. 영화 '바람'이 정우의 자서전적 이야기라는 얘기를 본인 입을 통해 듣고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존경, 그리고 사랑을 듬뿍 담아 스토리를 만들었고 제작과 연출을 겸한 이 감독이 이에 감명 받아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량주 한 잔을 훌쩍 들이킨 뒤 그가 들려주는 사부곡(思父曲)을 듣자니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에도 주책없이 찔끔 눈물이 났다. 정우 역시 "아버지 영전에 이 영화('바람')을 바치는 마음으로 연기에 임했다"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정우의 엄하지만 따뜻한 가족들과 요즘 말로 1진이었던 고교 시절 무용담(?)은 영화 속에 세세하게 묘사된다.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다. tVN 인기 시리즈 '응답하라'의 원형을 보는 듯 하다.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는 이성한 감독의 굵고 간결한 연출력도 일품이지만 정우를 비롯해 손호준 권재현 등 배우들 연기는 연기파를 자처하는 거액 스타들 저리 가라할 수준이다.
영화 속 정우는 늘 사고 치고 말썽 부리는 문제아 고교생이다. 담배 피고 땡땡이 치고 학교 폭력서클에도 들어간다. 교내 폭력사건에 휘말려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그럼에도 그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고 제 자리를 찾는 배경은 가족의 사랑 덕분이다.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으로 정우가 치른 질풍노도의 10대 후반 시절은 막을 내렸으니까.
정우의 배우 인생은 '응답하라 1994'가 아니라 '바람'에서 다시 시작됐다.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그는 그해 겨울 MC 새 주말드라마 주인공으로 뽑혔다. 그전까지 영화 '숙명', '짝패', '스페어', 드라마 '못된 사랑', '신데렐라맨' 등에 출연하며 업계에 얼굴을 알려 왔지만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그리고 '응팔' 시리즈 신원호 감독은 자신의 '응답하라' 분위기에 딱 맞는 '바람'에 꽂혔다. 정우뿐 아니고 손호준을 '응사'의 주연급으로 캐스팅했고 손호준은 신데렐라처럼 떴다. '바람' 출신들은 '응답' 시리즈를 발판 삼아 늦게나마 제 2의 배우 인생을 열어가는 중이다. 이번 '응팔'의 동룡이 아빠 '학주' 선생님의 경우 '바람'에서 정우의 가정교사로 열연을 펼친 인물. 정우의 폭력서클 선배로 등장했던 삼총사도 한 명은 '시그널'의 과학수사요원으로 고정 출연중이며 나머지 둘도 스크린 외출이 잦아졌다. '응사'와 '응팔'에 연속 출연한 마이콜도 '바람'의 문제아 가운데 한 명.
기자는 '바람'을 네 번 봤다. 시사회 때 처음 봤고 이 영화에 청소년 관람불가란 심의가 떨어진 뒤 두 번째, '응사'가 방영되면서 세 번, 이 칼럼을 쓰기 전에 네 번을 채웠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이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는 천만 영화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불운의 명작일지라도 정우 아버지의 돌봄이 있으셨는지 그 출연자들은 모두 제 길을 잘 찾고 있으니 또 기쁘지 아니한가./mcgwre@osen.co.kr
[엔터테인먼트 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