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은 시작 전부터 '백인잔치'라는 오명을 얻었다. 남녀주연상과 남녀조연상 등 주요 후보 20여 명의 명단이 모두 백인으로만 채워진 것. 이에 대해 조지 클루니 윌 스미스 부부, 스파이크 리 감독을 비롯한 할리우드 영화인들은 흑·백 구분 없이 쓴소리를 뱉었다. 생각보다 '백인잔치'의 파급력은 커서 온라인 상에는 '백인잔치 오스카(#OscarsSoWhite)'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다양성이 부족한 아카데미 시상식에 불만을 제기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결국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셰릴 분 아이작 위원장은 시상식이 열리기 한 달 전인 지난달 22일(현지시각) "후보들의 인종 다양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성명을 발표 하고 평생 유지됐던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10년으로 줄이는 등 다양성 확보를 위한 쇄신안을 발표했다. 다양한 인종을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위원을 세 명 더 추가하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이처럼 아카데미 시상식의 인종 편향성이 문제시 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 배우 이병헌의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은 현지에서도 의미있게 읽히는 일이다. 이병헌은 지난 2일(현지시각)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측이 공개한 제2차 시상자 명단에 포함됐다. 이 명단에는 스티브 카렐, 퀸시 존스, 자레드 레토를 비롯, 총 열세 명의 스타가 이름을 올렸다. 이로써 이병헌은 한국인 최초로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하게 된 스타가 됐다. 그는 지난 23일 시상식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현지 외신들은 이병헌이 모건 프리먼, 우피 골드버그, 케리 워싱턴, 프리앙카 초프라 등과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을, 논란을 진화시키기 위한 아카데미 시상식 측의 노력으로 본다. 비록 주요 수상 후보에는 유색인종이 오르지 못했지만, 시상자를 비롯한 아카데미 시상식 곳곳에 유색인종 스타들을 배치한 것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동양인 배우의 입지는 매우 협소하다. 아시아 인종이 주요 시상 부문인 남녀주연상을 탄 경우는 인도 혈통의 메르 오베른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유일할 정도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이병헌의 아카데미 시상식 참석은 그 자체로 의미가 특별하다. 이병헌은 미국 태생이 아닌 아시아 출신 동양계 배우로 A급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하는 몇 안 되는 배우들 중 하나다. 아시아에서도 남다른 입지를 가진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시상자로 선다면, 아카데미 시상식의 입장에서는 구겨진 체면을 조금이나마 세울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다양성을 대변할 수 있는 존재라 할 수 있는 것.
사실 이병헌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처음 참석하는 한국인 배우로 이름을 올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할리우드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충무로 출신 배우들 중 가장 탄탄한 입지를 자랑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 '놈, 놈, 놈'으로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은 그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을 시작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이후 '지.아이.조2'와 '레드: 더 레전드'에 출연했고, 또 다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 T-1000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었다. 이 작품들을 통해그는 할리우드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명성과 인기를 쌓았다.
그리고 할리우드 커리어의 결정적 역할을 할 작품들이 올해와 내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황야의 7인'과 '미스컨덕트'다. '황야의 7인'에서 이병헌은 덴젤 워싱턴부터 크리스 프랫, 에단 호크, 빈센트 도노프리오, 와그너 모라, 헤일리 베넷, 제이슨 모모아 맷 보머 등 할리우드 대세 배우들과 함께 주연을 맡아 화려한 액션극을 보여줄 예정이다. 촬영은 끝났고 2017년 상반기 개봉 예정. 그 뿐만 아니라 알파치노, 안소니 홉킨스 등과 함께 할 '미스컨덕트'도 기대작 중 하나다./eujenej@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