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은 사용된 것은 1988년 교도소 이감 중 탈출해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의 입에서 나왔다. 비록 범죄자의 말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표현은 30여년이 흐른 요즘도 통용되는, 시의적절한 명언이다. 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표현이 꼭 어울리는 상황이 tvN 금토드라마 '시그널'에서도 재현됐다.
지난 27일 방송된 '시그널'에서는 재한(조진웅 분)의 백골사체를 발견하게 되는 해영(이제훈 분)과 수현(김혜수 분)의 모습이 그려졌다.
재한을 죽인 것은 치수(정해균 분)였다. 과거 형사 반장이었던 범주(장현성 분)는 국회의원 장영철(손현주 분)의 사주를 받고 인주 여고생 성폭행 사건을 조작했다. 인주 여고생 사건의 주요 범인들이 학교에서 학생회 간부였을 뿐 아니라 그 중에는 인주 시멘트가와 연관된 학생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들은 돈 있고 '백' 있는 집안의 자식들이었다.
범주는 "비바람을 대신 막아 줄 바람막이가 필요하다. 아무도 감싸주지 않을 만한 희생양이 필요하다"며 선우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선우는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였던 해승을 지켜주던 친구였지만, 범주의 조작 아래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는 누명을 썼다.
이 사건의 진실을 쫓는 사람은 재한(조진웅 분)이었다. 재한은 인주 여고생 성폭행 사건을 조사하면서 모든 증거가 조작됐고, 조작을 한 인물이 범주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로써 재한의 죽음에는 치수 뿐 아니라 범주가 깊이 개입돼 있음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이번 회가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힌 것은 어린 고등학생들이 벌인 사건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통용되는 현실이다. '시그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님에도 보는 이들에게 기시감을 주는 사건들을 등장시키는데, 이번 사건 역시 그랬다. 가장 약한 선우가 가장 큰 피해를 받게 되는 약육강식의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되풀이 되는 일이다. 재한을 죽인 치수는 딸의 불치병으로 일을 그만 둘 수 없는 처지였고, 범주의 압박을 받던 중 일을 저질렀다. 범주도 권력에 굴복한 죄밖에 없다. 이들의 상황은 따지고 보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논리대로 흘러왔기에 가능했다.
시청자들은 진실을 밝히다 결국 죽임을 당한 재한이 살아나기를 바라는 분위기다. '시그널'이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매우 구체적이고 그럴듯하게 그려내고 있지만, 결국 무전기 통화를 통해 과거를 바꿔 미래에도 영향을 준다는 설정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과거와 연결되는 기적의 '시그널'이 없다면 재한은 오늘도, 다음주에도 백골사체의 상태일 것이다. 또 10년 전, 20년 전, 30년 전 반복됐던 일들은 오늘도 계속되고, 진실은 거짓 아래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시그널'에는 기적 같은 설정, 과거와 통화를 할 수 있는 무전기 같은 것이 없다면 절대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시사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eujenej@osen.co.kr
[사진] '시그널'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