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역사를 돌아봤을 때, 장르물이 tvN ‘시그널’ 만큼의 반향을 일으켰던 적은 매우 드물다. 실제 사건들을 절묘히 녹여낸 탄탄한 이야기의 힘은 물론, 이를 바탕으로 신들린 연기를 펼친 배우들의 환상적 호흡 덕이다. 그 가운데서도 차수현 역의 김혜수가 돋보이는 까닭은 십수년에 달하는 세월을 종횡무진하며 어리바리한 신참 경찰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베테랑 형사의 모습을 위화감 없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그널’ 속 현재의 차수현(김혜수 분)은 30대 후반, 15년 경력의 형사다. 거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긴 시간을 보내온 덕인지 웬만한 남자 형사보다 더 ‘깡 있고’, 더 맷집이 좋아 보인다. 쉴 틈 없이 말을 하는 수다쟁이 동료 김계철(김원해 분)과 비교해 보자면 말수도 극히 적다. 대신에 행동으로 말한다. 건방진 엘리트 경찰 박해영(이제훈 분)을 간단히 휘어잡는 차수현을 보면 긴 머리를 단정히 내려 묶은 채 동그란 눈을 들어 이재한(조진웅 분)을 바라 보던 15년 전의 그는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이처럼 당당하고 단단한 모습 속에, 차수현은 여린 속살을 숨겨 놓고 있었다. 그의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인 수사 자료 가운데는 배트맨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있다. ‘수갑 하나당 짊어진 눈물이 2.5리터다’라는 문구가 적힌 그 액자 속에는 평생을 가슴에 품어 온 선배 경찰 이재한과 함께 찍은 사진이 차수현을 바라본다. 험난한 세월, 겉모습은 마치 굳은살처럼 딱딱해졌지만 이재한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분홍빛 속살 그대로다. 김혜수는 이 같이 이재한을 생각할 때마다 처연해지는 차수현의 얼굴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그런 차수현이 시시때때로 15년 전의 신참 시절을 회상한다는 설정은 이를 연기하는 김혜수에게도 상당한 부담이었을 터다. 드라마 내용상 이러한 설정이 반영되는 부분도 상당량이다. 15년이면 얼굴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고, 상황도 변하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다. 막 경찰이 됐을 때의 차수현은 선배들 눈치 보느라 쩔쩔 매던 보편적 신입의 모습 그대로였다. 몰래 이재한의 무전기에 스마일 스티커를 붙이는 깜찍함도 있다. 15년의 시간을 두고 과거의 차수현과 현재의 차수현은 극과 극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차수현의 15년이 매끄럽고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 것은 김혜수의 연기력 덕일 터다. 과거의 차수현에게는 현재의 그가 희미하게나마 묻어 있고, 현재의 차수현에게는 과거의 그가 잔존해 있다. 과묵한 형사 차수현이 집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 조카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이다. 조직폭력배들은 맨손으로도 제압하면서, 조카들에게는 기꺼이 밟혀 준다. 언뜻 보면 전혀 다른 사람 같지만, 그건 차수현을 모르는 이들이 하는 소리다. 정신 없이 오가는 세월을 차수현이라는 캐릭터 안에 온전히 담아낸 김혜수의 호연이 눈부시다.
‘시그널’은 KBS 2TV ‘직장의 신’ 이후로 3년 만의 브라운관 컴백작이면서, 첫 케이블 드라마 도전작이다. 그러나 우려 따윈 필요 없었다. 31년차 배우 김혜수에게는 세월도 가지고 노는 연기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종영까지 4회를 남겨 둔 현재, ‘시그널’은 이변 없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을 듯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시그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