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파리의연인’부터 ‘태후’까지…김은숙의 신들린 ‘대사빨’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03.04 17: 19

 드라마 작가 김은숙은 ‘예능은 PD 놀음,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시쳇말을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능력도 일품이지만, 상황에 짝짝 달라 붙는 차진 대사야말로 작가 김은숙이 가진 가장 위협적인 무기다. 벌써 12년 전이지만, SBS ‘파리의 연인’ 속 한기주(박신양 분)가 강태영(김정은 분)의 손을 잡아 끌며 “애기야 가자!”라고 했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다양한 모습으로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김은숙이 쓰는 대사의 힘은 발화 목적과 대상이 분명하다는 데서 온다. 그의 극본은 독백이나 방백 대신 극 안에서의 대화 위주다. 극 중 화자와 청자는 주어진 대사를 탁구대 위 공처럼 빠르게 주고 받으며 포지션을 바꾼다. 마치 액션 장면에서 미리 짜 둔 합에 의해 배우들의 몸이 부딪히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여기에 김은숙 드라마 특유의 환상적 설정이 가미되며 그의 전매 특허와도 같은 ‘오글거림’이 만개할 때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김은숙을 대한민국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계의 독보적 존재로 만든 것이 이 ‘오글거리는’ 대사다. 상기했던 “애기야 가자!”를 비롯해 SBS ‘시크릿 가든’의 “길라임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나?”는 물론이고 SBS ‘신사의 품격’ 속 “끼부리지 말아요. 나랑 잘 거 아니면”은 보는 이들의 정신을 파괴하는 동시에 드라마에 푹 빠져들게 만들었다. 최근 SBS ‘상속자들’ 속 그 유명한 ‘사학루등(사탄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인가)’까지 김은숙 명대사의 반열에 올랐다.

KBS 2TV ‘태양의 후예’에서는 대사의 톤이 좀 더 담백해진 느낌이었다. 지난달 24일 첫 방송 직후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김은숙의 향기가 안 난다”는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김은숙은 역시 김은숙이었다. 해당 드라마 제작발표회 당시도 “(오글거리는 대사가)아마 엄청 나올 것”이라고 예고했듯, 어김없이 시청자들의 손발 사정을 봐 주지 않는 대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시진(송중기 분)과 모연(송혜교 분)이 극장 데이트를 하는 장면을 보자.
모연 “난, 극장에 오면 이때가 제일 설레요. 불 꺼지기 바로 직전.”
시진 “난, 태어나서 지금이 제일 설레요. 미인이랑 같이 있는데 불 꺼지기 바로 직전.”
같은 장면에서 이런 대사도 나온다. 서로 나이 얘기를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다.
모연 “아니, 아까 그 상황은 오빠가 먼저 약올렸잖아요.”
시진 “아, 내가 오빠구나.”
모연 “뻥인데. 내가 누나예요.”
시진 “아닌 것 같은데. 민증 까 봅니다. 난 미성년자 아닐까 걱정했는데.”
모연 (큰 웃음)
당사자들은 참 행복할 ‘오그라듦’이다. 그러나 ‘태양의 후예’의 대사에는 이러한 정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로 사람을 지키는 의사 모연과 사람을 해쳐야 사람을 지킬 수 있는 군인 시진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의 가치관을 피력하는 장면 속 대사에서는 불꽃 튀는 기싸움과 동시에 철학적 의문까지 만나볼 수 있다. SBS ‘온에어’ 속 오승아(김하늘 분)의 “대상에 공동이 어딨어? 이게 개근상이야? 선행상이야?”이라는 촌철살인 일갈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유쾌함과 진지함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추는 김은숙의 신들린 ‘대사빨’이야말로 그가 쓴 드라마가 매번 대중을 만족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태양의 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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