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을 향한 이끌림’이라는 것은 실존할까? 혹자는 이를 학습된 감정으로 치부한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퍼져 있는 미신 같은 것이 이러한 이끌림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TV를 통해 연결된 이산가족이 각자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때면, 우리는 이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렇다면 숫제 서로를 모른 채 각기 다른 가정으로 입양돼 30년 가까이 살아온 쌍둥이 자매가 절절 끓는 애틋함과 본능적 그리움을 보여 준다는 것은 가능할까?
이들의 입장이 돼 본다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생모의 뱃 속에서 나오자마자 각자 위탁모에게 맡겨진 두 사람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가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서로의 존재를 받아 들일 수 있다고 단언하기는 힘들 터다. 영화 ‘트윈스터즈’는 당사자의 입을 통해 이처럼 신비로운 경험을 증언한다. 유튜브를 통해 서로를 발견하고, 페이스북으로 관계를 시작하며, 스카이프로 연결을 지속하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는 과연 인터넷 발달의 총아인 동시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이다.
극적인 상황을 그리면서도 영화는 매우 담담하게 흐른다. 사만다는 미국에서 배우 활동을 하고 있었고, 아나이스는 프랑스의 부모와 살다가 영국에서 패션 공부 중이었다.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은 그야말로 ‘우연히’ 인터넷 상에서 조우하지만, 어색함은 순간이었다. 사만다와 아나이스는 이 평범치 않은 사건 앞에 몹시도 해사하게 웃는다. 사만다와 아나이스를 물리적으로 연결한 것은 인터넷이었지만, 정말로 서로를 잡아당기는 ‘핏줄’이 존재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은 모니터 속 닮은꼴에게 그리움을 전한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니”라며 감격의 눈물도 흘린다.
이윽고 진짜 살이 닿는 만남을 하게 된 사만다와 아나이스 앞에는 지독히도 현실적인 과정들이 자리했다. 복지회를 찾아가 생모를 확인하고,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실제로 쌍둥이인지를 가리는 일들이었다. 가까스로 이어진 두 사람 사이에는 이처럼 냉정한 과학과 현실의 자가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사만다와 아나이스는 외려 보는 이들이 의아할 정도로 긍정적이다. 비극 속의 두 자매를 동화 속 쌍둥이 공주로 보이게 만든 것은 분명 경이로울 정도로 밝은 사만다와 아나이스의 웃음이었다.
이 사랑스러운 자매가 보여 준 달콤한 환상에는 갈등도 있었다. 겨우 찾은 생모가 이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매 순간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던 샘도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특히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었던 아나이스의 실망이 컸다. 생모를 찾아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아나이스였지만, 위탁모와 만난 후부터 “한국에 아주 예전부터 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이 열릴 것”이라 믿은 샘의 노력은 아나이스의 슬픔도 감화시킨 것이다.
영화는 나란히 앉아 생모를 향해 따뜻한 마음과 그리움을 담아 편지를 쓰는 두 자매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과연 이 놀라운 경험 앞에서 사만다와 아나이스 만큼 당당하게 미소지을 수 있을까. 자신을 거부하는 생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두 자매의 한없이 긍정적인 모습이 정답은 아닐 터다다. 그러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이들의 긍정적 삶은 이를 향해 가는 멋진 풀이 과정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트윈스터즈’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