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유진모의 취중한담]한국에서 나이는 매우 중요하다. 나이 먹을수록 더 집착하는 경향이 짙었지만 이젠 젊은이들이 더 심해져 1년 차이가 아니라 6개월마저도 ‘세대차이’로 규정할 정도다.
그런 한국에서 ‘한국나이’로 스물은 각별하다. 어른들에 의해 오랫동안 억눌려온 정체성 혹은 주체성을 펼칠 수 있는 성인이 되는 시기고, 대학이라는 인생의 굉장히 중요한 영역으로 편입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스물을 맞는 만 19(10진법에 익숙한 우리에게 19는 불완전이다)살의 한국 청춘들에게 그 시기는 중요성만큼이나 불안한 환승역이다. 흥행작 ‘스물’이 학업 연애 취업 등 20살의 공통적 3대 고민을 재미있게 풀었다면 ‘글로리데이’(최정열 감독, 엣나인필름 배급)는 한국의 20살을 어두운 곳으로 몰아가고 그 몰이를 하는 어른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20살의 봄을 맞은 용비(지수) 지공(류준열) 두만(김희찬) 상우(김준면)는 죽고 못 사는 친구다. 두만은 다행히(?) 대학 야구팀 감독인 아버지 덕에 야구선수로서 그 대학에 입학했지만 지공은 떨어져 재수를 시작했다. 용비는 아예 진학할 뜻이 없고, 상우는 집안형편상 그럴 수가 없어 포기했다.
그래서 상우는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신청했고, 그가 내일 입대하게 됨을 핑계로 친구들은 배웅하겠다며 부모 몰래 포항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날 밤 청춘을 불사를 ‘껀수’를 찾아 뒷골목을 헤매던 이들은 카섹스를 하는 듯한 승용차를 발견하곤 구경을 하려다 갑자기 차에서 뛰쳐나온 여자를 뒤따라 나온 남자가 무차별 폭행하는 것을 보곤 달려가 여자를 구해준다.
하지만 상황이 야릇하게 흘러가 이들이 집단폭행범으로 몰린다. 네 친구는 귀찮아서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달아나다 상우가 차에 치어 병원에 실려가고, 세 친구는 지구대로 잡혀간다. 이들은 혐의를 부인하던 중 분노를 참지 못해 기물을 부수고 급기야 경찰서 강력계로 넘어가는데 어느새 폭행치사 혐의가 적용된다. 억울한 이들은 형사에게 계속 항변하고 결국 그들이 구해준 여자가 경찰서에 나타남으로써 사태가 제대로 수습될 듯하지만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알고 보니 여자는 그 지역방송사 유명 아나운서고 가해 남성은 그녀의 남편으로서 그날 진짜 죽었다. 그런데 여자는 남편과 바람을 쐬던 중 네 친구에게 폭행을 당했고 그렇게 남편이 죽었다고 위증을 한다.
두만은 전형적인 중하층 평민이다. 대학 야구팀 감독으로 살아가는 두만의 아버지는 그 나이 또래의 가장들처럼 그저 생계를 위해 적당한 비리도 저질러가며 살지만 중상층으로 올라설 가능성은 제로다. 그래서 그저 두만이 야구선수로 성장해 프로팀에 가거나 어느 학교 코치자리라도 찾길 바라기에 ‘뒷구멍’으로 자신의 팀 소속 선수로 끌어들임으로써 대학진학을 성공시켰다.
이에 비해 지공은 중상류 혹은 상하류층이다. 꽤 넓은 아파트에 살고 아버지는 시의원이다. 시의원이면 서민 중 정말 정치에 소신이 있거나 아니면 돈만 많은 사업가일 확률이 높다. 지공의 어머니를 볼 때 아버지는 후자에 가깝다.
상우는 고물을 주워 파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산다. 노숙자를 제외한 최고빈민층이다.
용비는 형과 둘이 산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세상을 떠났고 그 일로 아버지는 장기복역중이다.
경찰서에 나타난 두만의 아버지는 강력팀장에게 촌지를 건네지만 지공의 어머니는 남편의 시의원 명함을 건넨다. 몇 푼의 현금보다 강한 압력이자 시위다. 그들은 용비의 형에게 ‘이렇게 위중한 일에 어째 부모가 아닌 형이 오냐’고 비아냥거린다.
영화는 바닷가 백사장을 흥에 겨워 질주하는 네 주인공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행동을 셀피 형식의 핸드헬드카메라로 슬로우모션으로 잡다가 돌연 어두운 포항의 밤거리를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긴박한 장면으로 전환하며 시작된다. 절정의 행복과 절망의 나락은 동시에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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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 영화의 주제가 오롯이 담겨있다. 한국의 아이들은 신분을 물려받는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통용되고 인정되는 세상이다. ‘동수저’ 이하는 어릴 때 부모들의 무조건적 희생과 사랑으로 곱게 자라다 어느 날 학생신분이 되고 부턴 일류대 입학과 대기업 혹은 공무원 취업의 노예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자나 깨나 공부고 그것도 모자라 각종 학원으로 뺑뺑이를 도느라 우뇌(왼쪽의 발달을 담당)를 계발해 정서를 풍부하게 함양할 겨를이 없다. 절대다수의 ‘흙수저’에겐 그나마도 행복한 고민이지만.
부모와 선생은 그들에게 삶의 최고의 가치관이 성공이고 그게 곧 부라고 한결같게 되뇐다. 답답한 교실보단 친구들과 산과 바다에서 뛰놀고 싶고, 틀에 박힌 체조보단 축구나 야구가 더 좋지만 현실은 멀다.
그래서 그들이 꿈꾸는 것은 일탈(자유)이고, 그걸 해결해줄 것은 오로지 시간(20살, 대학)이다. 대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에서 강제로 술을 먹이고, 성추행을 하는 게 과연 선배들이 전부 알코올중독자고, 폭군적 성향을 지녔으며, 성도착자이기 때문일까?
그들이 그럴 ‘권력’(주권)을 가질 날을 기다리며 얼마나 서럽고, 고통스럽고, 인내했는가를 이해하고 그래서 반성하려는 어른들의 자아성찰은 없는 세상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이 있다. 정말 그럴까? 그건 혹시 기득권을 물려주려는 1%의 야비한 세습욕과 희망적인 미래를 만들어 줄 수 없는 무기력감에 절망한 99%의 ‘비겁한 변명’은 아닐까?
알파고가 이세돌을 유린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 외형적 생활의 편의와 수준은 첨단으로 치닫고 있지만 정작 정서적 행복지수는 낮아지며 천인공노할 각종 범죄가 창궐하는 이유를 서민들은 잘 모른다. 혹시 지도층은 오히려 꿰뚫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가 묻는 답이다. 결국 아이들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찰과 부모는 진실규명을 원하지 않고 각자의 편의만 추구한다. 경찰은 빨리 해결하고 퇴근하고 싶고, 부모는 ‘동네 창피한 게’ 싫고 아이의 앞길에 오점을 남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진실대신 타협(조작)을 강력하게 촉구한다.
진실과 우정이 최고의 가치관인 줄 알았던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에 의해 갑자기 속성으로 속물이 돼간다. 아니, 어른이 돼간다.
네 명의 주연배우들의 연기와 개성은 썩 봐줄 만하다. 엑소의 수호(김준면)와 ‘응답하라 1988’의 류준열만 해도 눈이 호강인데 다소 낯선 지수는 새로운 청춘스타의 가능성이 크게 엿보이고 김희찬 역시 조심스레 개성파 배우의 약진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의 연출과 대화법은 거칠다. 관객을 배려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일방통행식 스토리 전개와 그다지 매끄럽지 못한 연출로 진행된다. 별로 충격적이지 않은 내러티브와 불친절한 결말 역시 앉은 자리가 불편할 정도다. 그런데 관람 후의 그 불편함과 찜찜함은 ‘더럽다’가 아니라 ‘미안하다’다. 용비가 아나운서의 폭행 목격 당시 친구들의 ‘경찰에 신고하자’는 만류를 뿌리치고 뛰쳐나가 그녀를 구한 이유가 또 다른 ‘엄마’가 나와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런 ‘정의’가 급격하게 ‘어른’이 되는 게 바로 20살이라니! /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