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인(30, 엄홍식)은 참 신기한 배우다. 인간 유아인은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소신을 거침 없이 말할 수 있어서 호불호가 엇갈리기도 하지만, 작품 속 연기하는 유아인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설령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래, 유아인은 연기를 잘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연기를 대중 예술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어서 전혀 무리가 없게 만드는 배우이기도 하다.
유아인이 또 하나의 작품을 끝냈다. 지난 22일 종영한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다. 정치인 이방원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 이방원의 고뇌를 다루며 늘 새로운 연기와 작품을 표현한다는 지겹도록 들어왔던 호평을 또 들었다. 더욱이 지난 해 영화 ‘베테랑’과 ‘사도’, 그리고 ‘육룡이 나르샤’까지 성공시키며 ‘아인 시대’라는 기분 좋은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배우이기에 이번 작품을 끝낸 감회가 남다르다. 그가 무려 1시간 30분 동안 기자 간담회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행복하다고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연기와 작품에 대한 갈증과 욕심이 담겨 있어서 앞으로 있을 최소 2년의 공백이 아쉽지 않았다. 그는 입대를 앞두고 있다.
-왜 이방원을 선택했고, 어떻게 연기를 했나.
‘육룡이 나르샤’ 이방원은 기존 사극 이방원과 달랐다. 우리에게 이방원은 유동근 선배님이 연기하셨던 ‘용의 눈물’ 이방원의 이미지가 있다. 선입견일 수 있다.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치인 이방원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인물의 내면이 비친다고 해서 미화한 것은 아니다. 언급을 하고 싶었는데 아름답게 보이고 싶다기보다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어떤 이유로 이런 선택을 했을까를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만족스러웠다. 50부 긴 흐름 안에서 변화를 다루고 싶었다. 나이의 변화, 내면의 변화,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긴 인물의 역사를 다루고 싶었다.
-정몽주, 정도전 등을 죽이는 이방원이 인상적이었는데 어떻게 연기를 했나.
타당성이 있게 그리려고 했는데 인물을 죽이는데 너무 타당성이 있으면 그게 미화니까 오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죽이고 눈물이 대본에 설정돼 있지 않은데 내가 울었다. 정치인으로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악인은 아니었다. 죽이거나 내가 죽거나 선택했어야 했다. 얼마나 힘들고 혼란스러울까 얼마나 연약함이 발동할까 해석하려고 했다.
-연기를 하면서 혼란스러웠다고 했는데 왜 혼란스러웠나.
사람들이 이방원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 어떻게 선입견을 깰지 고민이 많았다. 사람들이 의식하고 있는 인과관계와 다른 것을 꺼내야 한다는 것, 역사적인 인물이다 보니까 역사에 대한 다른 해석을 불편하게 받아들이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다. 어느 작품보다 혼란스러웠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방원을 어떻게 전달할지, 조금만 나아가도 역사왜곡과 미화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 이방원이다.
원래는 사도였는데 바뀌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동안 연기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됐다. 내가 순간에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보통 지나간 후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이번에는 그 순간에 느껴서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채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내가 연기했던 인물 중에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더 입체적일 수 있지만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오래 남을 것 같다.
-정치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어떻게 말할지 고민이 된다.(웃음) 정치에 끊임 없이 관심을 갖고 있다.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화되고 있는데 개인의 영달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게 정치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성세대가 만든 문법에서 벗어나서 유연한 시각으로 정치를 바라보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대학을 갈지 어떤 직업을 갈지 만큼 어떤 사람이 정치에 임해야 할지 생각하는 투표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고민을 많이 하고 그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을 뽑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방원이 생각하는 대의는 무엇이고 이방원이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까.
대의는 가치의 우선 순위다. 무엇을 우선 순위로 삼느냐에 따라 대의가 달라질 거다. 방원의 대의는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으로 온 것 같다. 어떤 사심이 개입하느냐에 따라서 현실적인 대의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방원은 살아 있으면 뭐라도 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이방원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정치를 하면 욕을 먹으면서 되게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난 이방원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웃음)
-유아인을 지탱하는 자신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자신감 없다.(웃음) 배우로서 내 자신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희소하다. 나를 드러내는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특이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까 어떻게 하면 멋있게 보일까 고민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창조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창조적으로 연기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게 본질이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일보다는 나도 만족하고 나 스스로 순간순간 보여드리는 것 그런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20대를 어떻게 지내왔나
20대 때는 충실히 했다. 방금 말씀드린 본질적인 부분에서 말이다. 얼마나 식상하고 재미없는 말이냐. 그런데 본질이 중요하다. 본질에 충실하면 재밌어진다. 다른 생각을 하니까 힘들고 어려운 거다. 감정적으로 힘든 일은 있겠지만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없었다. 연기라는 부분에서 본질에 충실하고 있어서 힘든 게 없었다. 어떤 작품을 할 때 멋있는 인물을 해야겠다 계산을 하기보다는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리고 뭐가 순수한 것인지 불순한건지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말해달라.
여유를 갖고 연기를 하게 됐다. 발성의 변화, 내가 낼 수 있는 다른 소리를 찾아갔다.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서 보여드리는 게 아니라 실험이라고 생각하고 보여드렸다. 50부작 긴 호흡에 있다 보니깐 어느 순간에 응답이 오고 점점 더 객관화되더라.
-유아인의 배우는 방향성을 갖고 연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런 것 없다.(웃음) 방향성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건 더 어릴 때는 없는 무게감을 더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 배우가 희소성을 갖는 건 무게감이라고 생각했다. 진정성 있는 배우의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걸 애쓰지 않고 본질을 보여드리는 게 맞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모든 배우들은 독보적인 존재, 유일무이한 배우가 되고 싶을 거다. 어떻게 독보적인 배우가 될 것인가 그런 고민을 했다. 연기를 보여드릴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왔다. 내가 시청률 20% 넘는 로맨틱 코미디 한 편 없이 작년 한 해 큰 사랑을 받았다. 정말 큰 선물이었다. 성취감을 느꼈다. 행복했다. 감사했다. 감개무량했다.
-인간 유아인이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사람이다.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이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기부를 많이 하고 있다.
기부는 조용히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멋있는 일을 보면 따라하고 싶지 않나. 할리우드에서 자선 파티하고 허세를 보이는 게 느끼하지만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추악하다고 생각한다. 기부에 참여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나도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할 만큼 기부를 많이 하지는 못한다.
난 어마어마한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속에서 얻어낸 결과물을 어떻게 나눌지 고민하고 있다. 저 스스로도 채찍질하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려고 한다. 모나지 않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겠다. 개인의 성공이 자기 자신이 잘해서 된 게 아니다. 누군가는 가난해야 누군가는 부자가 돼야 하는 게 시스템이다. 다 내 것인 것 같지만 내 것이 아니다. 그런 냉정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 드라마를 통해 연기 외적으로 어떤 것을 이루고 싶었나.
배우가 연기 말고 이루고 싶은 게 뭐가 있나? 출연료 많이 받는 것? 아니다. 그냥 오해하지 않고 제 도전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 순수한 도전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다른 인간인지 보여드리고 싶었다. / jmpyo@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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