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 17년. 험상궂은 악역부터 나쁜놈들 때려 잡는 형사까지 안 해 본 역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베테랑 배우의 퇴장은 남달랐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위기협상팀장 공지만 역을 맡은 유승목 이야기다. 버럭 내지르는 목소리만큼 행동력도 빨랐던 그가 순직으로 드라마를 떠나며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 12일 방송된 tvN ‘피리부는 사나이’에서는 경찰청장 양동우(김종수 분)와 국회의원 정상문(김홍파 분)의 TV 토론이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형사 이철종(이원종 분)의 인질극이 벌어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전파를 타며 시청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진짜 피리남 윤희성(유준상 분)은 13년 전 뉴타운 재개발 시위 당시 무력 진압을 강행했던 양동우의 죄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던 이철종은 윤희성의 도움으로 인질극을 자행했지만, 당연히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가짜 피리남 정수경(이신성 분)의 생각은 달랐다. 누군가 죽어 나가야지만 대중의 주목을 끌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윤희성의 기지로 테러를 막기 위해 인질 몇 명의 생명 쯤은 희생해도 된다는 양동우의 비뚤어진 사상이 생방송으로 공개됐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은 정수경은 살인가스를 이용해 인질들을 죽이려고 한다. 공진만(유승목 분)은 이를 막으려 정수경과 육탄전을 벌이다 쓰러진 조재희(장성범 분)를 발견하고 그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었다.
둘도 없이 아끼던 후배 조재희가 피칠갑을 하고 있는 광경을 본 데다가 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목적을 관철시키려 하는 정수경을 발견한 공진만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몸을 던져 피리남을 제압하려던 공진만은 정수경의 칼을 맞고 끝내 사망했다.
사실 공진만이 주성찬을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겉만 번드르해 보이고 개인주의적인 주성찬이 성실한 의리파 공진만에게는 달갑지 않았을 터. 그러나 피리남의 사주를 받은 아들 정인(곽동연 분)의 자작극 해결에 주성찬이 힘을 보태며 그를 향한 공진만의 마음이 열렸다. 이후로는 마음에 없는 성을 낼 때도 있지만 누구보다 주성찬을 믿어주는 조력자로서 그에게 협조했던 공진만이었다. 그런 그가 차가운 시신이 되어 경찰청 식구들 앞에 나타났을 때, 모두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공진만 캐릭터는 이를 연기한 유승목의 연기 내공에 의해 완성됐다. 때로는 감정 없는 섬뜩한 눈빛도, 무뚝뚝하지만 정 많은 얼굴도 전부 유승목이 맡았던 배역 속에 있던 모습이었다. 이 모두가 공진만이라는 인물 안에 녹아나며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캐릭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위기협상팀의 대들보는 무너졌지만, 공진만의 죽음은 진짜 피리남의 정체를 밝힐 수 있는 단서를 줬을 뿐만 아니라 주성찬을 각성시켰다. 이날 방송 말미 그간 공진만의 활약상이 한 장면 한 장면 펼쳐지며 그를 추모했다. 그는 드라마를 떠났지만, 악을 처단할 힘으로 남은 공진만의 퇴장은 슬픔과 함께 빛났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피리부는 사나이’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