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파 배우들의 숙명일까. 막연하게 어려워하게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배우 천우희를 만나기 전에도 솔직히 그랬다. ‘한공주’라는 예술성 짙은 영화로 청룡의 여인이 되면서 알려진 만큼 다소 어려웠던 것이 사실. 그러나 이런 시선은 천우희가 짊어지고 가야할 숙명이 아니었음을, 지상에서 한 칸 높은 곳에 굳이 그녀를 올려놓고 바라봤던 것은 선입견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벽을 깬 건 천우희가 지닌 편안한 분위기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영화 ‘해어화’(감독 박흥식) 속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서연희처럼 은은한 향을 내뿜는 꽃 종류에 가까웠다.
‘한공주’를 비롯해 ‘손님’까지 작품 속에서 그녀가 연기한 캐릭터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참 많이 다쳤던 바. 외적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던 신은 거의 전무했다. 거의 단벌에 가까운 옷차림이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등장해왔던 것.
‘해어화’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할을 맡게 된 천우희는 여배우로서 즐거움을 전했다. 화사한 파스텔 톤의 한복은 물론 모던 걸로도 변신해 영화 전반부 반짝반짝 빛이 난다.
“배우가 아니었다면 제가 어떻게 이런 옷들을 입어볼 수 있을까요. ‘해어화’에서 나온 한복들은 특히 시대적인 느낌이 드러나서 너무 좋았어요. 예쁜 옷을 입은 쾌감이요? 여배우로서 굉장히 즐거웠죠.(웃음) 이런 제 모습을 스크린을 통해서 보니까 저에게 이런 모습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억지로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사랑을 주고 싶은 연희와 천우희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았다. 연희는 친구 소율(한효주 분)을 비롯해 윤우(유연석 분), 당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이난희(차지연 분)의 애정도 독차지하는, 그야 말로 사랑스러운 캐릭터. 특히나 그동안 상처 입은 소녀들을 연기했던 천우희는 이번 작품을 통해 비로소 해맑고 그야말로 소녀다운 소녀가 됐다.
“연희를 통해 지금까지 연기했던 것 보다는 밝은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 저는 대부분 사람들이 봤을 때 제 이미지가 정해져 있다고 아직은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또 다른 면모를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렇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시도해볼만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배우에게 한 얼굴이 고정된다는 것은 비극이다. 천우희는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뷰티 인사이드’ 속 캐릭터 우진처럼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희망한다. ‘해어화’ 다음에는 ‘곡성’(5월 12일 개봉)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나홍진 감독의 6년 만의 신작. 강렬한 캐릭터를 예고한다.
“가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이런 모습일까, 아님 내가 원하는 것이 이 모습일까’하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늘 강렬한 캐릭터를 찾는 건 아닌데, 배역보단 시나리오 전체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죠. 어떻게 보면 제가 연기함에 있어서 남들보다 조금 더 특유의 강함이 드러나서 제가 계속 강해보일 수는 있겠다고 생각해요. ‘해어화’의 연희 같은 경우도 강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곡성’ 같은 경우도 어떻게 보면 여배우가 꺼릴 수 있겠지만 저로서는 얼마든지 시도해고픈 배역이었죠. 언제 또 이런 시나리오를 만날 수 있을까 싶었던 것 같아요.”
역시 배우는 배우였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더욱 빛났으니까. ‘멀게 느껴지는 배우’라고 보는 대중의 반응에 대해서는 풀고 싶은 생각도 유지하고 싶은 생각도 있는 ‘반반’이라는 입장.
“풀어야 하는 숙제이자 유지하고 싶은 거리감이라고 할까요. 배우로서 보일 수 있는 점은 연기로 보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저는 그렇게 무겁거나 어려운 상대는 아니거든요.(웃음) 특히나 가까이 있는 분들은 아실 텐데. 주변 분들에게 저를 많이 표현하는 편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매체를 통해서 저를 일부러 감싸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싶어요. 저 사실 코미디 같은 가벼운 소재도 좋아해요. 친구들끼리 평소에 상황극도 하는데. 항상 도전하고 싶은 장르랍니다.”
천우희라는 이름에 앞서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가 주로 붙어왔다. 천 가지 얼굴을 연기할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라는 의미다. 그녀가 지향하는 바도 이 수식어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들은 스스로 붙이는 것이 아닌, 대중이 붙여주는 것이라며 겸손함을 드러냈다. 이처럼 일에 있어 프로페셔널하지만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그녀의 매력이 대중을 사로잡는 비결이 아닐까.
“독보적인 배우라거나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믿고 보는 배우라는 타이틀은 어떤 배우라도 다 욕심이 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건 어느 순간 따라오는 것이지 그것을 위해 연기를 하고 싶진 않아요. 그저 지금은 ‘여배우’ 천우희가 아니라 ‘배우’로서 존재감이 드러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랍니다.” / besodam@osen.co.kr
[사진] 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