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이 위기의 프로그램(?)에서 지금의 국민 예능이 되기까지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수장인 김태호 PD는 '무한도전'의 11주년이 되는 날이었던 지난 23일, 서울 마포구 백범로 서강대학교 이냐시오관 강당에서 열린 ''무한도전'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라는 강연에서 지난 11년간 프로그램이 걸어 온 길을 정리했다. 특히 "캐릭터가 가장 중요하다"는 그는, '무한도전' 초창기 멤버 구성에 대한 비판과 우려가 가장 많았다며, 당시 걱정했던 멤버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분석은 냉정하고 명확했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멤버들에 대한 애정을 묻어나 눈길을 끌었다.
◆ 정형돈, '못 웃기는 개그맨' 캐릭터 제시하니 엉엉 울어
김태호PD의 기억에 정형돈은 초창기 마음고생을 가장 많이 한 멤버였다. 이미 KBS 2TV '개그콘서트'에서 콩트 개그로는 실력을 인정 받았던 정형돈이었지만, 콩트 개그와 전혀 다른 리얼 버라이어티 콘셉트의 '무한도전'에서는 자신감을 잃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거기에 정준하까지 들어오니 뚱뚱한 캐릭터까지 빼앗겼고, 그렇게 캐릭터가 없는 상태로 4년을 표류하게 됐다.
김태호PD는 "정형돈이 왜 같이 가느냐에 대해 항의하는 분도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차피 처음부터 부족한 사람이 모였는데 굳이 여기서 우열을 나눠서 잘하는 사람을 남기고 못 하는 사람 빼는 게 너무 현실과 닮은 것 같아서, 누가 나가면 누군가 최하위를 하게 될 거고 해서 최대한 보호하면서 갔다"고 말했다.
이어 "정형돈은 그 때부터 밤마다 술로 보냈다. 새벽 3~4시가 나를 포함 멤버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시간이다. 그 때 잘못 받으면 잠을 다 자는거다. 최근에도 2시부터 전화가 오는 것 보니 술을 좀 먹는 것 같다"며 "당시 정형돈에게 지금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자고, 새로운 캐릭터를 제안했다.'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겁 많은 사자 캐릭터였는데, '형돈아 걔는 사자인데 나비를 보고 무섭다고 숨고 그림자 보고 도망다니고 그런거거든? 역설적인 캐릭터이긴 한데, 개그맨인데 못 웃겨, 못 웃기는 개그맨 캐릭터도 놓고 보면 재밌지 않을
까?' 얘기 했더니 정형돈이 엉엉 울더라.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캐릭터구나,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런 정형돈이 서서히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은 '패션 테러리스트' 캐릭터 때부터였다. 김태호PD는 정형돈이 스태프 결혼식에서 은갈치 정장을 입고 발리 가방을 든 것이 너무 웃겼다며, 그 모습을 방송에서 보여주기 위해 멤버들 전원이 은갈치 양복을 입었던 시크릿 바캉스 특집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정형돈의 모습을 가져갔는데 너무 웃겼다. 그 때부터 정형돈은 편한 캐릭터, 웃음에 대해 고민 안 해도 되는 캐릭터가 된 거다. 정형돈한테 요구를 하면 팬들이 싫어한다. 정형돈은 서 있는게 웃긴데 왜 자꾸 무리한
요구를 하느냐고 하더라"라고 설명했다.
◆ 노홍철 대신 안성기와 이계인?
초창기 노홍철은 어른 세대에게는 비호감일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김태호PD도 노홍철의 캐릭터에 대해 어른들의 불만을 많이 접했는데, 특히 '섹션TV'를 통해 인연이 있었던 디자이너 故앙드레김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를 한 에피소드를 밝혀 눈길을 끌었다.
김태호PD는 "앙드레김 선생님이 MBC가 나오는 11번을 보고 있는데 '상당히 불쾌한, 품위 없는 모습이 자꾸 나와서 김태호PD에게 전화를 했다'고 하시더라. '뉴질랜드 원주민처럼 생긴 친구의 목젖이 자꾸 보인다. 누군가에게 얘기를 할 때도 입을 가리고 하는데 매스미디어에서 목젖 보이는 게 충격적'이라고 설명하시더라. 이 캐릭터가 다가가기 힘든 상황인가에 대한 생각을 했다"며 비호감 이미지가 있었던 노홍철의 캐릭터에 대해 설명했다.
비단, 노홍철 뿐 아니라 김태호PD는 초반, 멤버들의 독특한 캐릭터로 인해 예능 국장에게 많이 혼이 났다고 했다. 그는 "항상 이야기가 나온 게 기회비용이었다. 국장님이 '토요일 저녁에 외식 포기, 데이트 포기하고 11번 틀었는데 정준하, 박명수, 정형돈, 노홍철 같은 사람들이 나오면 너 같은면 기분이 좋겠느냐? 게스트 부르고 호감가는 사람 넣자'고 하셨다"며 "안성기를 멤버로 섭외하라고 하셨다. 남성을 위해서는 이계인 씨를 섭외하라는 말을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 월요일이 되면 '기억이 안나, 까먹었다'고 변명하던 시기다"라고 비화를 전했다.
멤버들에 대해 MBC 내부에서나 시청자들까지 여러 비판이 있었지만, 결국 김태호PD와 '무한도전' 멤버들은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토요일에 가장 보고싶은 얼굴들이 됐고, 11년간 가장 성공한 예능 프로그램의 예로 오랫동안 사랑 받았다. /eujenej@osen.co.kr
[사진] '무한도전' 홈페이지, OSEN 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