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강국, 미국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사실 오래지 않았다. 5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미국은 슈퍼 히어로물의 1인자로 자리매김하며 세계인들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타국의 콘텐츠들을 위협했다. 잘 짜여진 세계관의 힘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는 27일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하는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이하 시빌워)를 향한 비상한 관심도 이를 입증한다.
규모는 비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영웅을 다룬 작품들이 존재한다. 일본 전대물의 형식을 차용한 ‘우뢰매’ 시리즈가 있었고, 중국 고사 속 의적 일지매를 소환한 ‘일지매’도 있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이야기 속 영웅을 불러온 작품인 ‘각시탈’이나 ‘전우치’도 큰 호응을 받았다. 있기는 있었지만, 미국산 슈퍼 히어로들의 물량 공세 탓에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지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시대는 혼란하고, 영웅담에 대한 갈증도 더해만 간다. ‘한국형 히어로’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겨진 상황에서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이하 탐정 홍길동)의 등장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영화는 막대한 부를 상속받은 황회장(고아라 분)의 조력을 받아 불법 흥신소 활빈당 운영하는 홍길동(이제훈 분)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그는 1980년대 대한민국의 모든 조직에 침투해 전횡을 일삼던 비밀 조직 광은회와 혈혈단신으로 맞붙는다.
극 중 홍길동 캐릭터는 상당히 꼼꼼하게 직조됐다. 항상 중절모와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주머니에서 캐러멜과 각성제를 번갈아 꺼내 먹는 외형적 개성은 물론, 좌측 해마에 손상을 입는 바람에 8살 이전의 기억을 잃고 두려움도 느끼지 못한다는 성격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설정들은 러닝타임 내내 일관적으로 유지된다는 점은 캐릭터에 힘을 실을 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몰입을 돕는다. 특히 주인공이 갖고 있는 결핍과 한국적 정서 ‘한(恨)’이 절묘하게 맞물리며 공감을 자아낸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처는 홍길동이 펼치는 활약의 원동력이 된다.
유독 만화 같은 이야기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탐정 홍길동’은 다소 과감한 선택도 했다. ‘씬시티’를 연상케 하는 화면 질감은 물론, 빛과 그림자를 다각도로 활용해 화면 속 구획을 정교하게 나누며 조형적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그렇다. 이에 대해 ‘탐정 홍길동’의 조성희 감독은 지난 2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공을 많이 들이고 신경 많이 썼다. 색깔 같은 경우도 악인과 선인이 구분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비현실적 느낌은 상기했듯 홍길동이 품고 있는 ‘한(恨)’의 정서와 맞물리며 땅에 발을 붙인다.
개봉 시기는 일주일 정도 차이가 나지만, ‘시빌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조 감독은 “‘탐정 홍길동’이 ‘시빌워’ 만큼 화려하거나 정신 못차리게 하는 액션이 있진 않지만, 관객들에게 색다른 구경거리를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시빌워’가 보여 주지 못하는 점들이 ‘탐정 홍길동’에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이는 잘 짜여진 홍길동 캐릭터와 그를 움직이게 하는 ‘한(恨)’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훈 역시 “‘시빌워’에는 영웅이 많이 등장하고, 그들에게는 인류와 세상을 구하려는 신념이 있다”며 “그러나 홍길동은 탈이념적 인물이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는 도중에 동시에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점차 변해 가는 모습이 한국형 히어로 홍길동의 차별점”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가끔은 불친절하기도 하고,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덕에 더욱 보완된 속편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진다. ‘탐정 홍길동’의 등장은 ‘한국형 히어로’ 발굴의 새로운 장으로 작용할 수 있을 듯하다. 오는 5월 4일 개봉. /bestsurplus@osen.co.kr
[사진] ‘탐정 홍길동’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