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손남원 기자] ‘추격자’와 ‘황해’, 단 두 편의 작품으로 한국영화 스릴러 장르를 새롭게 포장한 나홍진 감독이 2016년 새 영화 '곡성'으로 돌아왔다. 전작들보다 제목은 더 으스스하지만 15세 관람가로 수위는 오히려 낮아졌다. ‘나홍진= 잔혹 스릴러’란 공식이 깨진 셈일까. 뼈를 가르고 살을 바르는 액션 수위는 줄었지만 음산한 귀기는 더 짙어졌다.
나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은 익히 알려진 데로 ‘추격자’(2008년)다. 자신이 각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에서 초보 감독은 기존 충무로의 틀을 깨는 파격적인 연출과 스토리로 관객의 혼을 뺐다. 당시 ‘추격자’ 시사회에서 만난 한 중견 감독은 영화가 끝나자 극장 밖 흡연공간으로 나가 담배를 얻어 피웠다. 금연한지 2년째였다. “저 친구, 신인 감독 맞습니까? 저렇게 잘 찍은 후배들이 나오는걸 보니 은퇴해야겠어요.” 짙은 한숨과 함께 역설적으로 최고의 찬사를 던지는 그의 표정에는 놀람과 기쁨, 그리고 비애가 교차해 지나갔었다.
‘추격자’는 예고편부터 화제였다. 쫓기는 하정우와 쫓는 김윤석. 두 배우 모두 신들린 듯 혼신의 힘을 다해 뛰고 또 뛰었다. 잡으려는 의지와 도망치려는 몸부림이 스크린 밖으로 생생하게 전달됐다. 압권은 비 오는 맨홀 뚜껑 위에서 넘어진 하정우가 순식간에 일어나 다시 들고 뛰는 순간이었다. 보는 기자의 손에 땀이 나고 입에서 ‘아’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한국영화의 발전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던 장면이다.
나홍진은 배우의 피를 말리는 감독이다. 그가 가진 단 1%의 기운까지 모두 뽑아낸다. 그가 연출하는 현장에서 완성도 부족한 ‘OK’ 사인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추격자’의 추격 신을 어떻게 찍었을 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젊은 하정우의 입에서 며칠 단내가 났고 나이든 김윤석은 군살이 쏙 빠졌다. 화제의 맨홀 신은 수십 차례 반복되는 촬영에서 하정우가 실제로 넘어진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뭐에 씌었는지, 하정우는 자빠졌다 일어서자마자 냅다 달렸고 카메라도 당연하다는 듯 그냥 돌아갔다. 당시 한 제작 관계쟈는 ‘추격자’의 흥행 대성공 후일담 삼아 “하정우가 넘어진 게 창피해서 발바닥에 땀날 정도로 더 열심히 뛴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그리고 ‘추격자’의 또 하나 백미는 엔딩 신. 신인 나 감독의 상상을 뛰어넘는 호러 액션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참고 또 참던 제작자와 배급사가 뒤로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극장에서 개봉한 ‘추격자’와는 전혀 다른, 나홍진만의 리얼한 잔혹 세상이 마음껏 펼쳐진 피바다를 본 것이다. 영화 내내 연쇄살인마 싸이코 패스에게 농락당하는 서영희는 죽어서조차 성하지 못했다. 엔딩신 내내 촬영장을 굴러다닌 건 서영희의 사지 육신이고 김윤석과 하정우, 최후의 대결의 무기 또는 흉기도 그녀의 몸뚱아리였다고 한다.
결국 이 엔딩은 나 감독의 항의와 상관없이 가위질을 당했고 개봉판 엔딩으로 바뀌어 상영됐다.
2년 후. 흥행 감독의 대열에 올라선 나 감독은 이번엔 작정한 듯 자신의 모든 호러 감각을 동원해 ‘황해’를 찍었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는 그 무시무시한 액션들을. 제작진의 반대를 무릎 쓰고 엔딩도 감독 의견 그대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곡성’. 이제 충무로의 중견 대열에 합류한 나 감독은 알아서 수위 조절을 했고 15세 관람가의 귀기 충만한 스릴러가 탄생했다. 영화를 본 감상은 이렇다. 꼭 피와 살, 그리고 뼈를 갈라야만 더 무서운 건 아니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mcgwir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