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실체를 확인할 적에 생득적 감각을 이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을 느낀다. ‘오감(五感)’이라 통칭하는 이 감각들은 하나가 결여되더라도 나머지가 평균 이상으로 예민하게 발달하며 그 균형을 맞추곤 한다. 실체를 더듬어나가는 일의 연속인 인간의 삶에서 감각이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터다.
오감만으로는 붙잡아낼 수 없는 영역에도 실체는 존재한다. 이때 인간은 즉각적인 ‘촉’, 육감을 발동시킨다. 육감은 때때로 눈과 귀보다도 빠르게 반응하며,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다. 그러나 육감을 통해 얻은 상(像)이 오감을 통해 획득한 정보와의 괴리를 드러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 ‘곡성’은 육감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대면했을 때 인간이 경험의 산물인 ‘의심’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나홍진 감독의 자신의 세 번째 장편 영화이자 칸 영화제 진출작 ‘곡성’을 통해 이 의심을 감각의 일곱 번째 자리로 들여 놓았다.
장장 러닝타임 156분을 자랑하는 이야기는 의문의 연쇄 사건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아름답고 조용한 시골 마을은 피해자들의 몸을 뒤덮은 두드러기처럼 흉측한 사건들로 쑥대밭이 된다. 돌연 눈이 뒤집혀 사람들을 물어 뜯고, 집에 불을 지르는 이웃 앞에서 경찰 종구(곽도원 분)는 속수무책이다.
맨 처음 이 변고의 원인으로 꼽힌 것은 야생 버섯 중독이다. 피해자들의 집 한켠에서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으며, 이로 만든 건강식품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과학 수사 결과에서도 버섯의 중독성이 발견됐다. 인간의 감각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물증이 나왔지만, 종구는 의심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곡성으로 흘러들어온 외지인(쿠니무라 준 분)이 그 표적이다.
외지인이 마을을 찾은 후부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그가 훈도시 차림으로 벌건 눈을 한 채 기괴한 행동을 하고 있는 광경이 목격됐다는 것이 의심의 근거다. 종구의 의심은 집요한 추적으로 이어졌고, 눈에 보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그러나 연역과 귀납을 반복해 봐도 의심과 확신을 연결하는 인과관계는 도통 발견되지 않았다.
종구는 자신에게 이 사건의 첫 증언을 해 준 무명(천우희 분)도 의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명은 시종일관 “그 왜놈이 귀신이여”라고 할 뿐 어떤 영양가 있는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외지인을 끔찍한 살육극의 근원으로 짚은 박수 일광(황정민 분) 역시 볼수록 의문스러운 존재이기는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곡성’은 맥거핀(관객들을 의문에 빠트리는 장치)들이 치밀하게 직조된 거대한 환상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 실체는 물론, 직감과 의심까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도대체 곡성 사람들은 왜 이런 비극을 만나야만 했던 것일까. 분명하기까지 한 원인들은 영화 속에 차고 넘치지만, 이를 결과와 확실히 줄이음할 수 없다. 단지 미끼를 던진 이와 이를 문 이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감에 육감, 거기에 일곱 번째 감각인 의심까지도 동원됐지만 이 어마어마한 물음표는 도무지 느낌표로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나홍진 감독은 ‘곡성’을 통해 숫제 모든 것을 의심케 하는, 영원히 납득할 수 없을 그 찜찜함의 외연을 매우 방대하게 확장시켰다. 단편 ‘5미니츠’, ‘완벽한 도미 요리’에 ‘추격자’, ‘황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이 개운치 못함의 정서는 ‘곡성’이라는 영화로 근사하게 실체화됐다. 엔딩크레딧이 전부 올라간 후에도 관객들은 의심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나홍진 감독이 던진 미끼를 기꺼이 물고 만 까닭이다. 낚시 찌는 특정 고기를 향해 손짓하지 않는다. 마지막 극 중 인물의 말처럼,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갈 수는 있어도 이 여운에서 빠져 나가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곡성’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