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감독의 신작 '곡성'을 보면서 몇 번이나 저절로 실눈이 떠졌다. 태연한 척 눈을 감고 숨을 돌리기도 했다. 옆 자리 후배에게 공포 영화 잘 못보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 정말 무섭고 잔인하다. 156분 러닝타임이 지나간 뒤 쏜살같이 극장문을 빠져나왔다. 환한 햇살 아래서 크게 숨을 내쉬고 감사한다.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나 감독의 데뷔작 '추격자'에 감탄하고 차기작 '황해'에 박수친 이후로 무려 6년 동안 고대했던 신작이 바로 '곡성'이다. 영화 관람 내내, 낡은 이층집 꽉 막힌 타일 벽의 구식 목욕탕에 갇힌 듯 싸이코패스의 냉기에 몸을 떨었던 '추격자'.
피가 넘치고 살이 찢어지며 뼈가 부서지는 '황해' 시사에서는 한국영화 하드고어 스릴러의 끝판왕을 대하고 숨이 멎는 듯 했다. 그래도 '곡성'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남 몰래 두 눈을 감고 주요 장면을 놓친 적도 없었다. '추격자'와 '황해'는 19금, '곡성'은 15세 관람가인데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영화 '곡성'의 공식적인 장르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기자의 느낌으로는 심령 호러에 더 가깝다. 감독의 전작인 '추격자'와 같은 장르라기 보다 1973년 첫 상영 이후 심령 호러의 대명사이자 고전으로 자리잡은 '엑소시스트'와 비슷하다. 단, 종교에 주안점을 둔 '엑소시스트'와 달리 '곡성'은 현실의 연쇄살인마와 악귀를 섞어놓음으로서 나 감독의 장기인 스릴러적 재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귀기는 '곡성'의 그것이 '추격자'와 '황해'를 뛰어넘는다. 잔인한 장면도 차고 넘친다. 하지만 전작들과 달리 결정적인 하드고어 장면을 여기저기 꺼내놓지는 않았다. 마지막 한 컷을 잘라낸 듯한 수위다. 대신에 관객을 옥죄는 상상적 공포의 수위는 더 높아졌다. 면도칼로 자른듯한 전개와 연출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무서움이 여기서부터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쿠리무라 준 등 특급 배우들의 인생 연기에 아역 김환희의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함이 어울려 객석에는 곡성 산골의 음산한 안개가 자욱하다. 악역들은 칼과 도끼, 뼈와 머리 등의 흉측한 살인도구를 쓰지않고도 관객의 심장을 도려낸다.
그래서 15세 관람가인 것이다. 참고로 '엑소시스트'도 같은 등급이었다. 또 청소년 모방의 우려가 있는 직접 범죄와 달리 심령적 요소가 강한 점도 참작된 것으로 보인다. 영등위 측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선정성 및 폭력적인 부분은 정당화 하거나 미화되지 않게 표현되어 있고, 그 외 공포, 대사 및 모방위험 부분은 사회 통념상 용인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에 담긴 선정성이나 폭력성이 사회 통념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나 감독의 전작보다 등급은 낮아졌는데 일부가 더 잔인하다고 느끼는 건 장르의 변주 때문 아닐까. 기자는 심령 공포물에 약하다. '황해'를 그러려니 재미있게 봤지만 '곡성'에 혼쭐이 난 배경이다. 어찌됐건 공포물은 무서워야 제 맛이다. 호러 팬들은 무섭지 않은 공포물에 시간을 뺏기면 화를 낸다. 최근 관객 외면을 받았던 정통 호러영화들은 '곡성'보다 몇 배 잔혹하게 만들었는데 왜 관객이 떨지 않았지? 만듦새의 문제다. 잘 만든 공포물과 스릴러는 훨씬 적은 죽음과 피를 갖고도 관객을 패닉 상태로 끌고 간다. '곡성'은 이같은 관점에서 성공한 웰메이드 수작이다.
크랭크인 단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던 '곡성'은 지난 12일 개봉과 동시에 마블의 블록버스터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mcgwir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