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언제나 느긋하고 여유롭다. 지난 15일(현지시각)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난 날도 그랬다. 어깨 너머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자리에 앉은 박찬욱 감독은 칸 영화제 수상에 대한 기대를 묻자 "전혀 기대를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의례적인 겸손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정말로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의 초연한 모습이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다른 기자들은 농담한다고 생각하던데..진심으로 영화제에서 상을 주기에는 상업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경쟁에 초대된 것도 의아했고요. 상은 전혀 기대 안 합니다. 18일에는 여행을 가요. 나도 좀 쉬어야죠. ('박쥐' 때처럼 연락이 온다면?) 연락을 하면 와야겠지만(웃음)"
'아가씨'는 제69회 칸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돼 각국에서 초청된 20편의 영화와 황금종려상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지난 14일 공식 상영회를 통해 영화의 첫 선을 보인 이 영화는 과감한 에로티시즘으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반응을 얻었다. 박 감독은 "기술적인 문제로 고치고 싶은 게 많다"며 완벽주의자다운 깐깐함을 드러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거예요. 이거 하나 바꿔서 관객이 '바꿨네'라고 알지는 못하더라도, 영화 전체적으로 좋은 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하는 거죠. 근데 기술의 영역이 넓어지니까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이 더 늘어나 후반 작업이 길어져요. 4월 말에 칸 버전으로 고치고 나서도 계속 고쳤어요. 출국하는 날까지 하고 밤을 새고 왔는데 그거에 비해 칸 버전은 내 눈에는 작은 결함들이 있죠. 뤼미에르 극장이 좋은 극장이어도 기술적인 그런 것들을 잊고 보려고 해도 귀에 들어오고 눈에 들어오고..."
'아가씨'의 원작은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다. 박찬욱 감독은 '핑거 스미스'를 읽은 이상 영화화를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만큼 형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매력적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1부가 끝날 때 반전이 너무 충격인 데다가 인생에 대한 뭔가가 담겨있는 내용이 좋았죠. 자기가 주도해서 속이고, 스스로 똑똑한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맞아요. 때로는 인생이 그런 거에요. 잘난척하고 제 의지로 사는 것 같지만 아닐 때가 많죠. 그런 비유로 아주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어요."
'아가씨'는 동성애 베드신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주인공인 김민희와 김태리는 극 중 귀족 아가씨 히데코와 하녀 숙희 역을 맡았다. 박찬욱 감독은 레즈비언의 이야기임에도 남성적인 시각으로 성을 묘사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에 대해 "고민을 하다 말았다. 포기했다. 그래봐야 선입견이 없어지는 게 아니니까"라면서도 "남성의 입장에서 흥미진진하게, 에로틱하게 찍으려고 하는 건 피해야겠다고 항상 조심하고 했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 이 장면에서 관능성이라는 게 없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있어야 해요. 그것이 남자라서 이렇게 찍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건 말릴 방법이 없죠. 최대한 노력은 하지만...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지 봐주세요."
함께 한 배우들에 대한 감탄은 빠지지 않았다. 극중 하정우와 조진웅의 모습을 "귀엽다"고 표현했던 그는 하정우에 대해 "인간적인 면이라고 할까요? 하정우 배우는 친근함, 과장하고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 같은 그런 캐릭터를 만들지 않고, 그런 연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조진웅에 대해서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면에 대해 "내가 웃겨야지 하고 외워와서 하는 농담이 아니고 천성에서 나오는 유머가 어떤 역을 해도 살아나기 때문에 그래서 귀엽다"고 고 칭찬했다.
어려운 연기를 소화해 준 두 여배우 김민희와 김태리에 대한 감정은 각별했다. 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김태리에 대해서는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태리가 자랑스러다기 보다는 내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찾아냈으니까"라며 농담을 해 웃음을 줬고, 김민희에 대해서는 그가 극중 선보이는 독회의 장면을 영화 속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으며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표현했다.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칠만큼의 자신감을 느껴요. 남의 언어(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언어인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연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에, 그 언어를 사용하고, 음란 서적을 읽으면서 주눅들지 않고, 완전히 상황을 주도해갔어요. (영화 속에서) 그게 배우이기도 하죠. 그 순간만큼은 배우죠. 그렇게 (김민희가 히데코로서) 장악하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뿌듯했어요.."
박찬욱 감독에게는 재밌는 별명이 하나 있다. 영화 '대배우'에서 이경영이 연기해 화제를 모았던 '깐느박'이라는 별명이다. '깐느박'에 대한 얘기를 꺼냈더니 박찬욱 감독은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거장이 보이는 인간적인 모습이 웃음을 줬다.
"류승완이 시작한 건데, 아 진짜...(한숨) 그럴 줄 몰랐어요. 창피해 죽겠습니다...창피할 뿐이에요."/eujenej@osen.co.kr
[사진] CJ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