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악역이라 더욱 애착이 갔죠.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더 악한 캐릭터를 맡고 싶어요.”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기억’에서 대기업 부사장 신영진 역할을 맡았던 배우 이기우가 이제까지 보여준 것과는 다른 연기로 새로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시원하게 뻗은 키와 착해 보이는 인상 덕분인 듯 그동안 주로 귀공자풍 연기에만 머물렀던 그가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으로 악역을 맡은 것이다.
극중 신영진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출세지향적인 인물이다. 날 때부터 좋은 가정에서 자란 이른바 ‘금수저’인데, 자신의 입맛에 따라 사람을 이용하고 버린다. 한마디로 비열하고 위선적이어서 정나미가 떨어지는 인물이다.
이기우는 18일 OSEN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네티즌들의 댓글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회차가 진행될수록 호평이 나와서 만족스러웠다”고 말했다.
데뷔한 지 13년 차에 접어든 이기우는 배우로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던 차에 때맞춰 들어온 악역 출연제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굳이 욕먹는 악역을 맡지 않고도 좋은 배역만 골라 출연해도 지금의 인기를 유지할 수 있는 연기자다. 그럼에도 그가 악역을 자청한 건 ‘기억’의 박찬홍 감독과 김지우 작가에 대한 신뢰감이 높았다는 것이다.
“감독님은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표현하라고 하셨어요. 지금껏 찍은 드라마 가운데 준비 시간이 가장 많았죠. 신영진이란 인물의 분량이 많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도 투자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도 신영진에 대한 제 의견을 궁금해하셨던 것 같아요. 리허설 때 준비한 걸 보여드렸더니 좋아하셨어요. 저는 그간 작품을 할 때 글을 쓰는 작가님에게 방해가 될까 의견을 묻고 듣는 걸 두려워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엔 전해들으니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이런 역할을 안 해봐서 스스로도 신선했어요.”
이기우는 지난해 영화 ‘베테랑’의 유아인이, 올 초 드라마 ‘리멤버’의 남궁민이 대한민국에 악역 열풍을 남긴 후라 부담감이 배가됐다고 했다. 두 사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에 고민이 많았다고.
그는 “악역은 늘 도전해보고 싶었던 캐릭터였는데 유아인, 남궁민 씨 뒤에 맡아서 부담감이 컸다”며 “하지만 시청률을 떠나서 시청자들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준 것 같다. (그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연구를 많이 했다”고 종영 소감을 전했다.
이어 “신영진이 겉모습은 건장하고 성숙한데 유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 인물이다. 한마디로 정신이 자라지 않은 키만 큰 아이다. 피규어를 모으고, 야구 배틀을 아끼는 오타쿠적인 기질에서 알 수 있다. 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없어서 힘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있는 장면에선 그가 미성숙하게 보이도록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이기우는 악한 역할을 소화한 비결로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했다. “친한 지인들에게 ‘내가 재수 없어 보이거나 무서워 보일 때가 언제였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배가 고플 때’ ‘억울한 일을 당할 때’라고 하더라.(웃음) 그런 부분을 메모해놓고 그런 상황에 유심히 제 표정을 살폈다”며 “악역이 나오는 작품도 다시 한 번 다 찾아봤다”고 말했다. 그는 “신영진 캐릭터를 통해 아이보다 더 유치하고 치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기억’을 마친 이기우는 배우로서 한층 성숙해있었다. 그 전보다 작품을, 연기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어느 덧 데뷔한 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어요. 초반엔 연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곱씹어본 적도 없었어요.(웃음) 어릴 땐 단순히 호기심이 많았다면 이젠 책임감도 커졌고 해보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캐릭터나 감독님도 많아졌어요.”
4개월 동안 밤샘 촬영을 이어온 그가 드라마를 마친 요즘, 평소 즐기던 캠핑과 서핑을 가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절친인 배우 김산호와 함께 여느 때 느껴보지 못한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purplish@osen.co.kr
[사진] 위드메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