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는 즐거움 중 하나는 캐릭터에 녹아들어 명연기를 펼치는 배우가 주는 카타르시스가 아닐까. 일상의 답답함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굳이 시간과 돈을 내고서라도 영화관을 찾는 이유다. 특히나 배우 하정우가 출연한다고 하면 신뢰도가 늘어난다. ‘하정우가 이번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해 시청욕구를 자극하는 것. 이 말은 그가 어느새 ‘믿고 보는 배우’가 됐다는 방증일 터.
하정우가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암살’ 이후 1년 만에 관객들에게 ‘근황’을 전한다. 영화판에서 이른바 ‘소정우’로 불리는 그는 그동안 ‘더 테러 라이브’ ‘군도’ ‘베를린’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대세 배우의 힘을 과시해왔는데 올 상반기에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로 다시 한 번 존재감을 과시하겠다는 것. 물론 제작도 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하반기에는 영화 ‘터널’로도 찾아온다는 사실.
‘아가씨’는 영국의 소설 ‘핑거 스미스’를 원작으로 막대한 유산을 받은 아가씨와 그녀의 후견인 이모부, 재산을 노린 백작, 그의 지시를 받은 하녀 등 네 사람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그린다. 이번 영화를 통해 박찬욱 감독과 처음 만난 하정우는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는 탐욕적인 백작 역할을 맡아 치명적인 매력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유혹한다. 역시나 그만의 코믹적인 면모도 돋보인다.
하정우는 26일 오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진행된 OSEN과의 인터뷰에서 “작년 8월에 ‘암살’을 찍으면서 박 감독님에게 제안을 받았다. 많은 분들이 제게 스케줄을 물어보실 때 ‘앙드레김’을 찍느냐고 물어보시더라.(웃음) 당시에는 앙드레김 계획이 없었다. 시나리오를 보내줄테니 한 번 읽어보라고 하셨다. 아예 날짜를 박아 그 날까지 답변을 달라고 하셨다”고 박찬욱 감독과 연을 맺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어 “시나리오를 보내 주시기로 한 당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생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박 감독님에게 문자메시지가 왔고, 이메일을 열어 곧바로 출력해서 읽어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저는 원작은 보지도 못했었다. 무엇보다 감독님의 각색이 마음에 들었다”고 말했다. 하정우의 작품 선택 기준은 “재미와 만드는 스태프와 감독”이다. 하지만 이번엔 두 가지의 비율이 비등했다고. “이번 선택은 박찬욱 감독이 5.5점이라면 시나리오의 재미가 4.5점이었다”고 말했다.
‘아가씨’에는 하정우만의 독특한 개그 코드가 묻어난다. 아가씨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면서도 은근히 여자를 밝히는 카사노바의 느낌을 풍기는 것이다.
“감독님이 제 전작을 많이 보신 것 같았다. 대사나 행동, 캐릭터 자체가 완전히 새롭진 않았는데 왠지 (전작들의)흔적이 느껴졌다. ‘아 이렇게 녹여내셨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100% 같은 캐릭터는 아니었기에 읽자마자 사무실에 하고 싶다고 전달했다.”
무엇보다 하정우는 박찬욱 감독의 꼼꼼함과 집념에 놀랐다고 했다. 같은 장면이지만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해서 촬영하는 그의 완벽함에 존경심을 표했다.
“제가 감독으로서 무엇을 놓쳤는지 비교 분석을 해봤다. 박 감독님이 진짜 끈질기게 파는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박쥐’ 후 ‘아가씨’를 세상에 내놓으려 하셨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내려놓고 ‘스토커’를 먼저 찍었다고 하시더라. 그런 얘기를 듣고 제 ‘허삼관’을 봤는데 (감독으로서)자세가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에 새삼 감탄했다”고 말했다.
하정우는 이번 영화를 마치 연극을 준비하는 기간 같았다고 표현했다. 크랭크인 3개월 전부터 일주일에 4번을 (영화 준비를 하는)사무실로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배우 및 스태프들을 만났다. 특히 일본어는 “1년 가까이 개인 교습을 받으면서 공부했다”고 했다.
“리딩을 스무 번 넘게 했다. 감독님이 배우의 대사가 씹히거나 다른 말이 튀어나오면 중지하고 입에 붙는 것으로 버전업을 시시킨다. 야구 선수로 따지면 스프링캠프부터 전력투구를 시키는 느낌이었다. 시나리오나 캐릭터, 디렉션을 모든 배우들이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 촬영에 들어갔다. 저도 연극부터 했기 때문에, 보통 3~6개월동안 그런 생활을 하는데, 영화를 하면서도 그러한 시간을 보낸다는 게 참 좋았다. 한 편의 연극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6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이었던 ‘아가씨’는 아쉽게 수상에선 밀려났다. 이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을까.
“저는 수상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감독님이 조금 기대를 하신 것 같기도 한데, 저는 지금껏 영화를 하면서 ‘이 작품으로 승부를 보자’ ‘수상을 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웃음)”/ purplish@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