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이른 무더위의 기세가 한풀 꺾인 5월의 어느 아침,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배우 하정우를 만났다. 최근 칸 국제영화제에 다녀온 터라 피곤한 얼굴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씩씩하게 걸어 들어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나지막이 인사했다.
하정우는 ‘배우’라는 고정관념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었다. 무게를 잡거나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일부 연기자들과 달리 기자들에게 유쾌한 농담을 던지며 자신을 향한 질문에 언제나 솔직한 답변을 내놓았다. 웃긴데 그렇다고 우습지는 않다. 핵심을 짚어 우직하게 내놓는 대답에 무게감이 실려 있어서다.
지난해 영화 ‘암살’로 천 만 관객을 돌파한 하정우는 올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아가씨’로 돌아왔다. 제6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공식 초청작으로서 개봉 전부터 관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호불호가 갈릴 터지만 올 상반기 기대작인 것은 분명하다.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된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와 그녀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기꾼스러운 백작(하정우 분), 그리고 백작에게 거래한 가짜 하녀 숙희(김태리 분), 아가씨의 후견인 이모부(조진웅 분)까지. 네 사람은 서로의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속고 속이며 복잡한 심리를 드러낸다.
하정우는 지난 26일 진행된 OSEN과의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과의 첫 작업에 대해 “굉장히 좋았다”는 소감을 전했다.
“감독님이 ‘비스티 보이즈’를 보신 것 같다. 시나리오에서 그 영화 속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 모습을 또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안했다. 새로운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줄 수 있지 않나. 저는 지금까지 ‘영화 한 편으로 팔자를 고쳐보자’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박 감독님의 새로운 작업방식을 느껴볼 수 있어 좋았다.”
하정우는 ‘아가씨’ 촬영 현장이 마치 연극 한 편을 찍는 과정과도 같았다고 비유했다. “저도 처음엔 연극으로 시작했고, 근데 이 영화가 연극처럼 준비하는 기간이 길었다. 리딩도 작가가 참석한 상태에서 20번 넘게 했다. 대사가 어색하거나 다르게 나오면 감독님이 정확하게 체크해서 다음번에 입에 잘 붙도록 버전업을 시켰다”고. 박찬욱 감독의 꼼꼼함, 영화에 대한 끈질긴 자세에 감탄했다고 했다.
사실 하정우하면 너무도 진지한 이미지가 강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수의 작품에서 워낙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캐릭터로 등장한 터라 그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하정우는 유쾌하고 솔직했다. 능청스러우면서도 코믹했고, 밝은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한마디씩 툭툭 던져 웃음을 안겼다. 역시, 하정우는 웃기는 남자였다.
김민희와의 호흡에 대해 “또래 여배우들을 봤을 때 늘 추천하는 배우였다. 그런 마음이 있어서 그런지 촬영 할 때 끝까지 편했다. 오히려 제가 더 많이 다가갔고 쓸데없는 농담도 했다. 대사를 주고받는 데 있어 전혀 불편함은 없었다. 워낙 센스가 넘쳐서 작업하기에 좋았다”고 평가했다.
박찬욱 감독이 대사나 표정에서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을 요구했지만, 감정선은 배우들이 표현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풀어줬다. “눈썹의 높이나 턱의 각도를 하나하나 체크하셨다. 머리카락이나 넥타이 위치가 변한 것까지 알아차리시더라.(웃음) 감독님이 민희, 태리 사이에서 제가 다리 역할을 하길 원했던 것 같다. 상업적으로 내가 맡은 백작 역이 관객들에게도 브릿지 역할을 하길 원했던 것 같다. 축구로 치면 미드필더, 윤활유 역할”이라고 비유했다.
‘허삼관’ ‘롤러코스터’를 통해 감독으로도 활동한 그는 박찬욱 감독은 물론 ‘암살’의 최동훈 감독, 올해 개봉을 앞둔 ‘터널’의 김성훈 감독의 촬영 스타일을 자신의 방식과 비교했다. 그들과 자신을 동일선상에 놓고 봤을 때 감독으로서 영화를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고.
“박찬욱 감독님이 ‘박쥐’를 끝내고 ‘아가씨’를 바로 하려다 마음에 안 들어서 내려놓고 ‘스토커’를 먼저 했다고 하시더라. ‘아가씨’에 대한 확신이 없으셨다고. 제가 (감독으로서) 무엇을 놓쳤는지는 아직 모르겠는데 자세가 부족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이 영화를 대하고 바라보는 태도에 감탄했다.”/ purplish@osen.co.kr
[사진] 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