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 칠순을 앞둔 배우 윤여정에게 여전히 참 잘 어울리는 단어다. 같은 연령의 배우라도 이미지는 제각각인 법이다. 많은 60~70대 여배우 중 윤여정은 시골보다는 도시에 어울리는, 도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꼿꼿한 태도와 똑부러지는 말투, 늘씬한 몸매와 패션 감각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계춘할망' 속 '손녀바라기' 계춘의 역할이 다소 낯설게 여겨졌던 이유는.
'계춘할망'을 보고 난 후 "분장을 너무 끔찍하게 했다"는 윤여정은 역시 윤여정이었다. 솔직한 화법 때문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니) 추억이 새로웠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피부가 너무 여기저기 빨개졌어요. (미용실에서) 머리가 옥수수 수염처럼 됐다고 하더라고요. 흰칠을 덧하느라고 순 알콜을 바른다고 했죠. 순알콜을 바르고 햇볕에 있으면 '옥시크린'이 되는거에요.아직도 뚝뚝 끊어져요. 안 그래도 늙어서 상태가 안 좋은데 그렇게
두 달을 바르고 얼굴에 이상한 알콜 칠하고 했으니. 지금도 부끄러운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져요.(웃음)"
그 고생을 하면서도 영화를 택한 이유는 역시 '도전정신' 때문이엇다. 특히 "(윤여정의) 도회적인 이미지는 이미 소진되셨다"며 적극적으로 캐스팅에 임한 제작자 임건중의 끈질긴 설득이 마음을 흔들었다.
"이 나이에 인디 영화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상업영화냐' 물었더니 그렇대요. 투자를 해요? 이랬더니 투자자가 있대. 나는 도시적인 이미지도 있고, 할머니는 다른 사람도 많다고 했더니 '도회적인 이미지는 소진되셨습니다' 이러는 거야. 말하는 게 재밌었어요. 감독을 만나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나요?' 이랬더니, 굽히지 않고 '맞습니다. 소진됐습니다' 이래요.(웃음) 그래서 귀엽기도 하고 재밌었어요. 어떤 얘기를 해도 뒤에서 하는 것보다 솔직하게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고마운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변신을 해야하지 않나? 도전을 해야하지 않나, 해서 도전을 하게 됐죠."
영화를 찍으면서 오래 전 돌아가진 증조할머니를 떠올리게 됐다. 윤여정은 "할머니의 사랑은 무한대"라며, 어린 시절 자신을 예뻐해줬던 그 할머니를 떠올렸다.
"우리가 독자집안이에요. 내가 몇 대 독자의 손녀 딸이니까, 그렇게 예뻐했주셨어요. 우리집에서 증조할머니는 10살 때까지 같이 살았는데 그 때는 음식을 씹어서 주고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너무 더럽고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할머니 하면, 질색하고 그랬는데 나이가 들고는 잊었어요. 과거를 잊었는데 쉰살이 넘어 문득 생각이 나는 거예요. 할머니한테 너무 미안하고..그 후로 매일 밤 자기 전에 할머니한테 기도를 하고 나는 믿는 종교가 없으니까..할머니한테 너무 미안했다고 얘기했죠. 다음에 만나면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어려서 몰랐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얘기를 근 15년쯤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보면서 할머니 생각이 나서 할머니에 대한 마음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무한한 사랑을 해보자, 그랬어요."
손녀 역할로 함께 한 김고은과는 촬영을 하면서 깊은 교감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김고은은 영화를 함께 하기 전부터 눈여겨 보던 배우였다. 그가 김고은을 영화 '은교'에서 보고 '계춘할망'에 캐스팅해달라고 감독에게 부탁했다는 일화는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이전까지는 그런 얼굴이 없었잖아요. 쌍꺼풀이 진하고 예쁜, 남자들이 예뻐하는 얼굴이 인기가 있었는데, (김고은은) 그런 얼굴이 아니에요. 배우는 얼굴에서 내 생각에는 예쁘다는 그런 것 보다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눈이나 입에 여백이 있든지 이야기가 있으면 감독도 쓰기가 좀 좋을 것 같고, 그럴 것 같아서. 김고은은 눈과 입 같은게, 특히 눈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은교'에서 박해일을 쳐다보는 눈이 좋았어요."
최근 윤여정은 tvN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출연하고 있다. '계춘할망'과는 또 다른 노년을 그려내고 있는 그는 극 중 모태솔로 노처녀 오충남 역을 맡아 김혜자, 주현과 삼각관계를 그리고 있다.
"너무 좋고 우스워요. 우리끼리 연기를 하는지 진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게 우리가 50년 역사를 같이 해서인가봐요. 난 고두심이네 아이 이름도 알고, 혜자 언니네 아이도, 김영옥 씨네 아이 이름도 알아요. 예전에는 다 같은 드라마에서 활동을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각 드라마의 엄마로 헤어진거죠. 그러다 .이렇게 모인거예요, 몇십년 만에. 포스터를 찍으면서 혜자 언니가 내 손을 잡으면서 그러더라고요.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게 해주려고 이런 걸 썼나봐'라고요. 포스터 찍기 전에 울컥했어요."
'디어 마이 프렌즈'는 '꼰대'라고만 치부받던 노인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며 젊은 세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윤여정은 노인이기 이전에 인간인 노년 세대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쓴 노희경 작가의 '매의 눈'을 칭찬했다.
"노희경이 매의 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쉰이 안됐나봐. 놀라운 게 늙은이 얘기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그걸 막 가르치게 교육적으로 쓴 게 아니고, 어른도 똑같다가는 걸 보여주잖아요.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지 나와서 보면 어른들도 똑같아요. 어른들도 그 순간은 처음인 거죠. 여러분이 안 경험한 것에서는 어른들이 지혜로울 수 있지만, 사람이라 감정이 앞설 때가 많죠. 똑같아요. 똑같아서 나는 젊을 때 그러지 못했는데 (노희경 작가가)그런 거 보면, 존경스럽죠. 나보다 나은 애구나. 자기 일을 잘 하니까." /eujenej@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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