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콧대 높은 유럽의 국제영화제들을 섭렵한데다가 영화로 광고제에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한 보기 드문 감독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데뷔 후 24년 동안 그가 따낸 수많은 트로피의 찬란함을 차치하고라도 박찬욱 감독은 ‘명장’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 다양한 작품 속에서 보여 준 독보적 스타일이 이를 방증한다.
그런 그가 신작 ‘아가씨’로 돌아왔다. 영국 작가 사라 워터스의 레즈비언 역사 스릴러 3부작 가운데 한 작품인 소설 ‘핑거스미스’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츠치야 가론의 만화 ‘올드보이’와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의 주요 설정만으로 각각 ‘올드보이’와 ‘박쥐’라는 전혀 다른 명작을 만들어냈듯, ‘아가씨’ 역시 그렇다. 원작의 주요 골자 중 하나였던 출생의 비밀을 빼고, 남성 캐릭터인 젠틀맨과 이모부의 역할을 늘렸다. 사라 워터스도 자기 것과는 퍽 다르다는 감상을 보냈고, 이에 영화의 크레딧에도 ‘based on’이 아닌 ‘inspired by’를 썼다.
제69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한국 최초로 벌칸상을 받고 돌아온 ‘아가씨’가 1일 국내에도 공개됐다. 단 7분의 예고편으로 120개국 선판매를 이뤄낸 이 작품에서 ‘깐느박’만의 세계를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드디어 베일을 벗은 ‘아가씨’는 개봉 전 박찬욱 감독의 자평처럼 애매한 구석이 전혀 없는, 명쾌한 영화다. 상상력이 틈입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꽉 닫힌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애초에 한 사건의 안팎에 존재하는 주요 인물들의 시각을 전부 보여주며 정보를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영화다. 감독의 전작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다.
극 중 인물들은 전부 속았지만, 속였다. 마치 작용·반작용 법칙처럼, 거짓에 카운터펀치를 맞은 진실은 이를 즉시 그리고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그러는 사이 ‘진짜’와 ‘가짜’라는 단어들은 완벽히 가치 중립적으로 변한다. ‘아가씨’의 프레임 안에는 유독 등을 돌린 인물과 그의 앞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많이 등장한다. 관객들은 캐릭터의 뒷모습을 더듬거나 거울에 투영된 상을 보고 상황을 짐작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의미를 잃고 그저 존재만이 남는다.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의 입에서 기어이 내뱉어지는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는 표현처럼 얼핏 그 뒤섞인 모양이 모호해 보일 수 있으나, 세 토막으로 잘린 이 이야기는 정확히 반은 영국식이고 반은 일본식인 히데코의 저택처럼 깨끗한 단면을 자랑한다. ‘박쥐’ 속 일본식 적산가옥과 한복집의 공존과는 전혀 다른 분명함이다.
의심할 구석 없이 명징한 이야기지만 감독은 여기에 설명까지 덧붙인다. 그가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대사가 많은 영화라고 밝혔듯, 극 중 인물들의 발화량은 상당하다. 스크린에 주어진 상을 보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귓전에 해설이 꽂힌다. 상황과 미장센으로 말을 대신하던 박찬욱의 영화 세계가 몹시도 친절해진 것이다. 극 초반 여집사(김해숙 분)가 하녀 숙희(김태리 분)를 맞아 들이며 저택의 전사를 줄줄이 읊는 대목은 다소 놀랍게 다가올 정도다. 대사는 1930년대의 말씨를 살린 덕에 문어적이다. 그러나 이 역시 직관적 표현들로 가득차 있는 덕에 결코 어렵다는 인상은 없다.
감독 특유의 유미주의적 시선은 영화 곳곳에 묻어 있으나, 이금자의 권총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대신 항상 꿈을 꾸는 듯한 히데코의 눈빛과 나른한 목소리가 오래된 목가구 내음처럼 부유하는 서재, 그리고 그 안에 가득한 책들이 우아함과 천박함이라는 양 극단의 미(美)로 보는 이들을 매혹한다.
이처럼 ‘아가씨’에서는 ‘깐느박’의 세계가 주던 느낌이 많이 걷혀 있다. 전작들이 내용물의 맛을 알 수 없도록 밀봉된 초콜릿 상자를 보는 듯했다면, ‘아가씨’는 유리병 속에 든 배 모형 같다. 무엇이 들었는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감각으로 훅 꽂혀 오는 이야기. 이성적 관조 대신 뜨거운 몰입을 가능케 하는 영화다. 박찬욱의 작품들을 사랑해 온 오랜 팬이라면 되레 아쉬워할지도 모를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가 아는 ‘깐느박’의 세계는 종언을 맞은 것일까. 아니면 단지 ‘친절한’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 뿐일까. 갑작스런 변화에 기대가 잠시 멈췄던 자리에 다시금 기대가 솟는다.
p.s. 1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던 아가씨와 하녀의 정사 장면은 높은 수위에도 불구하고 담백하다. 외려 숨을 죽일 만큼 관능적이었던 건 하녀가 아가씨의 치아를 갈아 주는 대목. 한 번의 눈맞춤도 없이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사이를 반복되는 동작이 채우고, 에로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신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온전히 내맡긴 채 하녀의 뾰족한 곳을 문지르는 히데코의 모습 위로 ‘스토커’의 인디아와 찰리가 피아노를 치며 가쁜 숨을 몰아 쉬던 장면이 오버랩된다.
p.s. 2 ‘아가씨’에서는 재미있는 인연도 포착된다. 과거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속에서 하정우에게 탁상 조명으로 무자비하게 얻어 맞던 조진웅이 드디어 복수를 한다. 두 작품을 모두 본 관객이라면, 이들의 역전된 관계에 피식 웃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아가씨’ 포스터,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