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서른인데, 다시 불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인 사람들이 털어 놓는 사랑 고민 가운데는 가끔 이런 내용들이 보인다. 불 같은 사랑. 밤이 아무리 깊었더라도 ‘보고 싶다’ 한 마디에 따뜻한 이불 속을 박차고 나설 수 있는, 언젠간 사라질 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모든 걸 다 바치고 싶은. 두 시선의 마주침 만으로 불꽃이 튀는. 보는 사람은 오그라들어도 그 안에 있는 스스로는 한없이 진지한. 나이가 들 수록 현실이 보이고, 감정보다는 관계가 우선이 된다. 불 속에 뛰어 드는 부나방처럼 사랑에 몸을 내던져 봤자 돌아오는 것은 행복보다 큰 상처였던 적이 많았다고, 사람들은 종종 고백한다.
그런데 알 건 다 알 나이인 tvN ‘또 오해영’의 주인공들은 이상하게도 사랑에 목을 맨다. 드라마 초반부터 두 커플의 결혼이 깨졌다. 특히나 결혼을 개인끼리의 만남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기는 이 나라에서, 극 중 캐릭터들은 감정에 솔직하되 주변인들을 아프게 할 결단을 내린다. 그냥 오해영(서현진 분)은 밥 먹는 게 꼴 보기 싫다는 남자와 살 수 없다고 했고, 예쁜 오해영(전혜빈 분)은 자신의 치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남자와 부부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이혼보단 파혼이 나으니, 이들의 선택을 마냥 이기적이라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점점 넘치는 감정에 이성이 마비된 양 군다. 박도경(에릭 분)은 결혼식 당일 잠적한 약혼녀의 사진 속에서 발견한 한태진(이재윤 분)을 바람 상대로 오해하고 그의 인생을 끝장낼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운다. 한태진과 결혼을 약속했던 그냥 오해영은 ‘쉬운 여자’를 자처하며 박도경을 향한 감정을 밀어 붙인다. 박도경을 떠났던 예쁜 오해영과 그냥 오해영의 마음을 짓밟은 한태진은 돌연 다시 옛 연인의 곁으로 돌아와 사랑을 갈구한다. 박수경(예지원 분)은 유부남을 잊지 못해 매일 술에 취해 주변인들을 오싹하게 만들고, 이진상(김지석 분)은 모든 생각의 끝이 섹스다.
이들은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남의 집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차를 들이 받으며, 울고 소리 지르면서 몸싸움을 한다. 속에 있는 말을 감추지 않고, 늘 술을 과하게 마시고 진상을 부리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이쯤 되면 세상 모든 극단적인 인물들은 ‘또 오해영’에 다 모인 것처럼 보인다. 매번 과한 설정들이 충돌하니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기 어려운 순간들도 포착된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 막장 드라마 속 인물들을 마음을 다해 미워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이들의 입 밖으로, 행동으로 튀어 나오는 ‘마음의 소리’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탓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를 떠올리며 “나 말고 이 세상 여자들은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내뱉는 그냥 오해영의 한 마디는 누군가 채 말하지 못한 속마음이다.
현실에서는 옛 애인과 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남자를 가방으로 후려치며 “왜 나를 헷갈리게 하냐”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을 터다. “사랑은 쪽팔리지 않습니다”라고 되뇌지만 늘 쪽팔린 짓만 하고 다니는 스스로가 미워 술의 힘을 빌어서라도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던 참담한 순간도 누군가에게는 존재할 것이다. 그 거친 감정선이 가끔은 절절하게 와 닿는다. 그래서 ‘또 오해영’의 비현실성을 마냥 고깝게 볼 수 만은 없다. 이 드라마의 한껏 과장된 세계가 그리고 있는 건 어쩌면 억지로 성숙을 덮어 쓴 우리의 민낯일 지도 모르니.
지난 7일 방송 말미, 매달려 오는 그냥 오해영을 밀어냈던 박도경은 다시 그에게로 돌진했다. 청보리밭에 누운 채 바람을 맞으며 봤던 박도경 자신의 미래에는 오해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의 조각 사이사이로 보이는 과거의 오해영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의 감정에 휘둘리기만 하던 박도경은 그의 미래에 오해영이 없다는 기분을 절감하고 솟는 눈물을 닦으며 도로를 내달렸다. 마치 “사람들은 죽을 걸 알면서도 살잖아”라고 했던 ‘내 이름은 김삼순’의 현진헌처럼, 이제 그는 다른 미래를 채색하고 있었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또 오해영’ 방송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