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 시네마] ‘정글북’, 우리는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다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06.17 08: 31

‘역지사지’란 말은 간단해 보여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몹시 어렵다.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려면 그의 입장에서 사고해야 하는 탓이다. 특히 소수자의 처지가 돼 보기란 쉽지 않다. 이를테면 남성이 임신 공포를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여성의 입장이 ‘돼야’ 할 텐데,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이 요구된다. 또 소수자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굳이 그들과 입장을 바꿔 봐야 할 당위성을 찾기 힘들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를 만들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런 역지사지를 계속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는 언제든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란 단순히 수가 적은 집단의 일원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1%의 권력자가 지배하지만 이들을 소수자라고 할 수는 없으며, 노동자의 수는 절대적으로 많지만 사용자 앞에서는 소수자가 되기 마련이다. 소수자란 곧 사회적 약자고, 결국 우리는 소수자가 아니면서 소수자다. 
영화 ‘정글북’은 동명의 원작 소설 속 설정들을 기민하게 변주하며 동물 일색의 정글에서 소수자가 된 인간의 아이 모글리(닐 세티 분)를 통해 보는 이들에게 역지사지를 가능케 한다. 도구와 불을 쓰는 인간은 본디 정글의 주인이던 동물들을 위협할 만큼의 힘을 지녔지만, 여기 홀로 떨어진 모글리는 머릿수로도 완력으로도 동물들에게 압도된다. 이곳의 상식인 ‘정글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정글의 법칙’이란 상당히 명료하다. 늑대의 힘은 무리에서 나오고, 무리의 힘은 늑대라는 논리다. ‘삼총사’의 ‘All for one, One for all’을 떠올리게 하는 이 법칙은 연대의 힘을 매우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기라(벤 킹슬리 분)가 부모를 잃은 모글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정글의 법칙’을 체득할 수 있는 늑대 무리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었다.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다운 바기라의 훈육 방법은 다소 강압적이었다. 그는 인간으로 타고난 모글리를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린다. 소수자인 모글리가 정글에서 살아가려면 짐승이 ‘돼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글리가 아무리 장성한다 해도 금수의 이빨과 발톱이 생길 리는 없다. 모글리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특질 탓에 정글의 동물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차별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글리가 늑대의 삶을 산다 할 지라도 쉬어칸(이드리스 엘바 분)은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발톱을 세운다. 바기라의 부단한 노력에도, 모글리는 여전히 소수자다.
이때 존 파브로 감독은 소설 속 설정을 비틀어 모글리의 영웅적 면모를 최소화하고, 이야기가 갖는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원작의 모글리는 정글에서 유일하게 뱀 카아의 최면에서 자유로우며, 횃불만으로 호랑이 쉬어칸을 쓰러뜨릴 수 있는 캐릭터로 묘사된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다시 태어난 모글리의 모습은 이와 다르다.
카아(스칼렛 요한슨 분)의 목소리에 현혹돼 목숨을 잃을 뻔한 영화 ‘정글북’의 모글리는 자신과 힘을 합쳐 준 짐승들 덕에 도구와 불의 힘을 써서 쉬어칸(이드리스 엘바 분)을 제압할 수 있었다. 모글리는 비범하고 월등해서가 아니라, 그를 소수자로 만든 특징을 발휘하며 정글에서 우뚝 선다. “그냥 정글에서 인간으로 살아. 인간처럼 싸워”라며 모글리를 격려하던 바기라와 짐승들의 연대 없이는 불가능할 일이었다. 모글리는 아직도 소수자이지만, 더 이상 인간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지 않는다. “네가 어른이 되게 놔 두지 않겠다”던 쉬어칸의 부르짖음은 불 속으로 사라졌고, 모글리는 짐승이 되지 않고도 인간으로서 정글의 모두와 공존하게 됐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완벽한 ‘되기’란 어쩌면 불가능의 영역일지 모른다. 당랑권을 쓴다고 사마귀가 될 순 없고, 늑대 흉내를 낸다고 늑대가 될 수 없으며, 도구를 쓴다고 인간이 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되기’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이다. 모글리와 정글의 동물들은 완벽히 서로가 되지는 못했지만, 함께 살기 위한 역지사지를 해냈다. 2016년판 ‘정글북’의 가치는 이 입장 바꾸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데 존재한다. 감독이 영민하게 각색해낸 이 오래된 우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소수자의 삶을 체험케 하고, 공존과 연대의 길을 모색케 하고 있었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정글북’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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